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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 ‘1987’의 울림과 떨림

2018년초 한국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영화 ‘1987’을 보았다. 아니, 보았다라는 표현보다는 뜨거운 관람의 대열에 나 역시 동참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좀 더 나을 것 같다. 그만큼 이 영화는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거대담론화 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자리에 가서 누구를 만나든 하나같이 이 영화를 거론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토록 뜨거웠던 1987의 여름의 현장을 직접 경험한 세대는 아니었고(대학생이 아니었으니) 간접적으로 지켜보며 그 때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어디선가 완전 무장한 전경들이 뻥~! 뻥~! 소리를 내며 쏘아대는 최루이 굉음을 내며 터지면 잠시 후엔 눈과 코를 뜰 수 없을 만큼 살인적인 최루가스가 퍼져 나갔다. 시위대의 대학생 형과 누나들이 비좁은 골목 곳곳으로 도망 다니면 그 뒤를 쫓는 헬멧 쓴 백골단들이 야차처럼 뛰어다니며 대학생들을 진압봉으로 무자비하게 폭행하여 초주검으로 만드는 모습, 곧이어 그들의 손에 질질 끌려 온 몸에 피를 뒤집어 쓴 채 반은 시체가 된 대학생들의 모습으로 이어졌다. 이것이 바로 나와 그 시절을 살았던 모든 한국인이 기억하는 1987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종교인들마저 시위에 참여하여 그들의 목소리에 힘을 보탰다. 한 집단에서 일어난 항쟁이 성공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은 바로 주변인들의 협력을 얼마나 얻어내느냐이다. 하물며 속세에서 벗어났음을 표방하는 종교인들마저 참여했으니 이 정권이 버틸래야 버틸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영화 ‘1987’은 그 당시의 한국사회의 모습을 매우 정확하고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는 그토록 뜨거웠던 그 시절을 살았던, 역사의 물줄기를 확 바꾸어 놓았던 사람들 하나하나가 모두 주인공이 되어 여러 에피소드를 담아내고 있다. 어느 한 사람이 주인공으로 전체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이 아닌 여러 사람들-고문치사의 진실을 밝히고자 애쓰는 검사, 진실을 밖으로 알리고자 애쓰는 감옥의 간수, 언론에 활자화시켜 세상에 알리려는 신문사의 기자-의 긴박함이 넘치는 상황과 행동을 묘사함으로써 그 시대를 살았던 한국인 모두가 주인공이며 그 시절을 기억해야 함을 이야기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분산된 인물들의 연기를 통해 영화를 만들다 보면 이야기의 구성이 매끄럽지 못하거나 혹은 매우 지루해질 수가 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한 순간도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팽팽하게 조여주는 솜씨를 보면 왜 그토록 많은 영화 관계자들이 장준환 감독을 극찬하는지 또한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그와 작업하고 싶어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정말이지 몇 번이나 장탄식을 뱉어냈는지 모른다. 있을 수 없는 기막힌 상황들이 나올 때마다 ‘그래~! 그 때가 생각난다. 저 때는 저렇게 살았어~!’ 를 회고하다가 ‘아~! 정말 우리가 저렇게 살았단 말인가?’라고 생각이 들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뜨거운 분노가 치밀어 오르며 장탄식이 절로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특히 박처원 치안감 앞에서 부하들이 ‘받들겠습니다’라며 대답하는 장면과 박처원이 감옥의 부하들에게 협박을 하는 장면의 대사인 ‘가족을 죽여 임진강에 던져 월북하려는 반역자로 만들어 버리면 된다’고 말할 때엔 온 몸에 소름이 돋으며 맥이 탁 풀리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정녕, 정녕 우리 한국인들이 저 시절을 살았으며 어떻게 저 시절을 견디며 살아왔을까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극장내의 수많은, 특히 여성관객들이 ‘어머~! 어머~!’ 를 연발하며(차마 그토록 엄숙하고 무거운 영화에 꺅~! 소리는 낼 수 없었던지 조용히 어머~! 를 연발한다) 훌쩍거리는 순간은 이 영화의 시작인 故 박종철 열사의 죽음을 물속에서 클로즈업 하는 장면, 그리고 故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을 맞고 쓰러지는 장면이었다. 그 땐 나조차도 흐르는 눈물을 도무지 막을 수가 없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은 엔딩 크레딧이었다. 1987년 당시의 모습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편집하여 보여주는 엔딩 크레딧을 잘 만들어서 인상 깊었던 것도 있었지만 그 보다는 엔딩 크레딧이 완전히 다 올라가서 끝을 알릴 때까지 어느 누구 하나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극장 안을 꽉 채운 수많은 사람들의 감동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에게 전염되어 꼼짝도 할 수 없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만큼 이 영화는 압도적이었다.


2. 그 시대를 살았던 지금 이 시대의 산 자들의 자세

대학생 시절의 우상호 의원의 모습. 반항기가 가득하면서 매우 날카롭고 이지적인 모습이 느껴진다.


이토록 뜨거운 반응을 보이며 사회현상으로 번지고 있는 이 영화를 ‘썰전’에서 다루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최근 방영된 ‘썰전’ 에서는 그 시절의 광장 한 가운데에서 가장 뜨겁게 보냈던 한 사람인 우상호 의원을 불러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배우 우현과 함께 찍힌 그 유명한 사진을 함께 보고 6월항쟁에 대한 이런 저런 추억을 회고한 다음에 나온 핵심적인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 때 그 시절을 살았던 그들이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으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영화 ‘1987’의 시작을 알린 故 박종철 열사가 대공분실로 끌려가 죽음을 당한 이유는 그의 선배인 운동권 학생 박종운이라는 자의 은신처를 끝내 함구하다 물고문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이 박종운이라는 자는 훗날 정계에 입문하게 되고 그가 선택한 정당은 다른 당도 아닌 한나라당이었다는 것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허탈함과 함께 배신감을 느꼈는지는 부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해 썰전의 패널이며 전 한나라당 의원이었던 박형준은 1987년 민주항쟁으로 인해 대통령 직선제에 의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체제를 성립하였고 그 이후의 산 자들은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생각이 분화된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 맥락에서 야당의 총재들이었던 YS, JP가 노태우의 민자당과 함께 3당합당을 했다는 것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는 매우 현실적이면서 안일한 논리를 펼쳤다. 한국사회의 보수세력이 내세우는 전형적인, 단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틀에 박힌 논리였다. 이런 현상을 보수세력의 어른들은 ’배신’보다 무려 ‘전향’이라는 매우 고급스러운 표현으로 포장을 한다.


박형준 전 의원과 함께 같은 정당에서 정치를 했던 인물 중 경기지사를 두 번이나 했다가 말년에 편하게 정치해보겠다고 대구 수성갑으로 지역구를 바꾼 다음 국회의원 출마를 했다가 엄청난 표차로 민주당 김부겸 의원에게 낙선을 당하며 개망신을 당한 김XX라는 자가 가장 대표적이다. 


내가 겪어 본 한국사회의 보수세력이라고 하는 분들의 논리가 다 그랬다. 젊은 시절에는 반항기가 많고 치기 어린 마음에 국가와 사회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지만 결국 나이가 들면 다들 보수화가 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라고. 1970년대를 살았던 일본의 젊은이들도 베트남 반전 시위를 했지만 결국 그들이 나이가 들면서 죄다 자민당의 지지자가 되었으며 한국 또한 하나도 다를 게 없다고. 이것은 사회에 대한 부당하고 비겁한 굴복과 패배가 아닌 자연스러운 순응의 하나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나 역시 많이 수긍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토록 열성적이었던 투사들이 결국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가서 월급을 받아 살다가 결혼도 하고 자녀도 가지고 전월세로 전전하며 살다가 그래도 대출받아서 집이라도 한 칸 마련하고 나면 저절~로 보수화가 되는 경향을 너무도 많이 봐왔다.


우상호 의원과 故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우상호 의원은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를 생각하면 자신에게 정치적 선택권이란 없다고 단언한다.



박형준 전 의원의 의견에 우상호 의원은 반론을 제기하였다. 故 박종철 후배가 목숨을 던져 살려낸 박종운이라는 자의 목숨은 박종철의 부모가 자신을 낳아 준 친부모 외의 또 하나의 부모이기 때문에 박종철의 부모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는 절대 할 수 없다는, 박종운이나 우상호는 정치적 선택의 자유가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아~! 그래~! 이것이다~!’라며 눈이 번쩍 뜨였다. 차라리 정치를 안 했다면 모를까 굳이 정치를 하겠다고 나서서 한나라당에, 그것도 세 번이나 국회의원이나 낙선하여 낙선왕이라는 참으로 불명예스러운 별명까지 얻었어야 했는가를 생각하면 우상호 의원의 그 생각과 말이 제대로 정답이었던 것이다.


3. 그 후로 31년. 앞으로 살아야 할 자세는?



썰전에 출연한 우상호 의원이 남긴 ‘박종운과 우상호에게는 선택권이 없다’라는 말은 내게 매우 깊은 여운을 남겨 주었다. 그리고 이는 비단 박종운, 우상호 같은 1987년을 살았던 운동권 학생들뿐만이 아닌 그 당시를 살았던 모두에게, 그리고 지금 2018년을 살고 있는 한국사회의 모든 이들에게 적용되는 정답이기도 하다.

우상호 의원은 1987년을 ‘광장에서는 승리했지만 제도권에서는 패배한, 그래서 죽 쒀서 개준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그 당시와 그 이후의 상황까지 모두 고려해 볼 때 매우 정확한 표현이었다. 그토록 수많은 대학생과 시민들이 피를 흘리고 이루어낸 직선제 개헌 이후의 대선에서 결국 민정당이 승리하는 꼴을 지켜봐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후보 단일화를 원했던 수많은 이들의 절규를 뒤로 한 채 민정당에 승리를 헌납했던 야당의 두 거목인 YS, DJ는 수많은 비난을 받아야 했다. 그 후 한 사람은 야당 지도자에서 여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는 있을 수 없는 역사를 만들어냈고 또 한 사람은 한 번의 정계은퇴를 번복한 다음 10년의 세월의 걸려서야 결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 그들의 이 엇갈린 선택은 너무도 많은 사람들에게 좌절과 패배감을 안겨주었다.


그렇게 늘상 패배주의에 젖어 살아야만 했던 그 시절의 그 사람들은 2017년 결국 광장에서도, 제도권에서도 승리하는 환희를 처음으로 맛보게 되었다. 1987년의 그 때와 달리 최루탄도 백골단도, 고문도 없었지만 시민들의 손에는 촛불이 들려 있었고 촛불의 힘은 엄청난 들불처럼 번져 결국 탄핵으로 한 시대의 종언을 고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어진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의 대표가 당선되는 역사를 맞이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2017년의 우리는 그 다음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답해야 한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그들이 왜 무너져서 줄줄이 오랏줄을 차고 법정에 출석하는 모습을 보여야만 했는가를 생각해야만 한다. 그들은 민주주의 국가를 ‘우리들의 나라’가 아닌 ‘나의 나라’로 생각했고 자신들이 ‘국민에 의해’ 선출된 사람이 아닌 ‘하늘에 의해’ 내려진 사람으로 착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을 선출해 준 국민을 받드는 존재가 아닌 찍어 누르고 지배받아야 하는 존재로 크게 착각한 것이다. 그들은 국민에 의해 임시적으로 선출되었음을 망각하였기 때문이다. 일례로 고등학생 아이들이 바닷속으로 수장되고 있던 그 긴박한 시간에서조차 머리를 다듬느라 회의 시간을 늦게 시작했다는 도무지 있을 수 없는 그 이유도 그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국민이 뽑아 준 대통령이라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과 변명이었다.

시민혁명이라 불리는 촛불정신으로 선출된 문재인 대통령과 정부, 그리고 민주당은 반드시 누가, 어떻게 그 자리에까지 앉혀 주었는가를 항상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 촛불의 바람이 언제 그들을 향해 다시 불게 될지 모를 테니 말이다.

Posted by sni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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