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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포스터는 영화를 보기 전 처음으로 접하게 되는 영화의 얼굴임과 동시에 영화를 볼 수 있도록 동기를 유발시키는 중요한 수단이기도 하다. 한 장의 포스터를 아주 잘 만들어서 내놓는다면 포스터만 보고도 당장 극장에 달려가서 영화를 보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요즘이야 찾아볼 수 없는 풍경이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시내 버스 정류장이랄지 쉽게 눈에 띄는 공공장소의 게시판에 영화 포스터를 붙여 예비 관객들을 강렬하게 유혹했다. 특히 청소년들은 한국영화계가 성인영화 일색이었던 1980년대엔 성적 호기심을 매우 강하게 자극하는 한국영화 포스터-여배우가 하얀 속살을 드러낸 채 카메라 렌즈를 요염하게 바라보는-를 접하다보면 성인 영화를 보면 안된다는 어른들의 훈계를 마음 속으로만 잘 간직한 채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성인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에 발을 들이곤 했다. 


1980년대를 휩쓸었던 성인영화들의 실상은 쉽게 표현하자면 ‘다 거기서 거기’였다. 특히 고전 해학극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들은 그야말로 천편일률적이었는데 남녀 주인공 중 어느 한쪽은 꼭 성적 욕구불만족의 불우한 삶을 살아가고 이를 해결해주는 잘생기고 힘좋으며 테크닉까지 좋아 단 한 번의 성관계를 잊을 수 없게 만드는 마법의 소유자들이 등장했다. 성관계의 과정을 대단히 과장되게 표현하여 관객들의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고 여배우는 하얀 속저고리 밖으로 나온 새하얀 가슴의 육감적인 장면이 나올 때면 극장 안이 조용해지며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렸다. 


이처럼 ‘다 거기서 거기’일 수밖에 없었던 당시 한국 성인영화계에서는 영화 시나리오의 빈곤함을 극복함과 동시에 호기심을 최대한 자극하여 영화관에 끌어들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바로 좋은 포스터를 제작하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당시 중 참 대단하다고 기억되는 포스터들이 꽤 있었는데 요즘 들어 참으로 오랜만에 그 시절의 포스터 두 편이 내 눈에 띄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보다 더한 걸작은 없다고 할 정도로 저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데 한 편은 1980년대 최고의 여배우 원미경 주연의 변강쇠 2, 또 한 편은 1980년대를 풍미했던 또 하나의 여배우인 선우일란의 데뷔작인 산딸기 2이다. 

 

1. 변강쇠 2

 


이 작품은 1986년 개봉하여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영화 변강쇠의 속편이다. 영화 변강쇠는 최전성기를 보내다 침체치에 빠졌던 배우 원미경이 다시금 영화에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으며 배우 이대근이 1980년대 최고의 성인영화 배우로 거듭나게 해준 기념비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이 포스터에서 맨 처음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은 포스터를 꽉 채운 여배우의 얼굴과 제목 외엔 영화를 설명하는 그 어떤 글씨도 적혀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만큼 이 포스터에서는 두 가지의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다. 하나는 전편이 이미 널리 알려졌으니 달리 설명이 필요 없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포스터에 함께 등장해야 할 남자배우의 존재를 알리지 않아도 오로지 원미경이라는 여배우 단 한 명의 존재감만으로도 영화 전체를 아우를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그리고 이 포스터를 찬찬히 보면 볼수록 이런 강한 자신감에 공감하게 된다. 그만큼 이 포스터에 드러난 원미경의 얼굴과 표정에서 이 영화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고 있다.  


먼저 원미경, 즉 극중 배역명인 옹녀의 시선과 눈빛을 살펴본다. 옹녀의 시선은 뒷쪽을 향해 있고 가늘게 뜬 실눈과 살짝 올라간 입꼬리로 옅은 미소를 짓고 있다. 이 한 컷의 사진에 담긴 여인의 얼굴 표정에서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어떤 것일까? 흔히 쓰는 표현들로 묘사하자면 아름다운, 관능미 넘치는, 치명적인, 사내를 홀리는, 팜므파탈 등의 다양한 표현들이 나올 것이다. 상상을 하자면 이런 설정도 가능하지 않을까? 한 사내가 길을 걷다 한 여인, 옹녀와 마주쳤다. 너무도 아름다운 자태에 눈이 휘둥그레졌으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그녀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마치 무엇에 홀린 것처럼 저도 모르게 뒤 돌아선 사내는 저만큼 걸어가는 옹녀를 불렀거나 혹은 부르고 싶었지만 차마 부르지 못했으나 옹녀는 이런 사내의 마음을 다 읽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뒤를 돌아보며 사내를 홀리고 있다. 이 모든 일이 찰나의 순간, 순식간에 벌어진 것이다. 


사내를 제대로 홀렸다면 또 어땠을까? 홀린 사내는 이성을 잃은 채 옹녀가 하자는 대로 아무데서나 자리를 펴고 옹녀에게 들이댔을 것이고 열 남자 마다하지 않는 옹녀는 이런 사내를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운명적으로 상부살(喪夫殺)을 타고난 여인답게 이 사내는 생애 마지막으로 최고의 쾌락을 맛본 후 그만 비명횡사하고 만다. 이를 본 옹녀는 늘 그랬다는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나 새로운 수컷을 찾아 또다시 먼 길을 떠난다. 


이 한 컷의 사진에서 이 정도 상상력이 나올만큼 원미경이 보여주는 표정은 압도적이다. 사내를 홀려 죽음으로 인도하는 치명적인 위험한 여인의 모습이라면 공포감이 느껴져야 하지만 원미경의 표정에서 웃음을 자아낼지언정 공포감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변강쇠라는 영화는 등장인물이 펼치는 서사를 해학적으로 풀어가는 작품이므로 한 여인과 섹스를 즐긴 남성은 반드시 죽어나가는 연쇄살인 사건의 이야기에 웃음은 있어도 공포 같은 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원미경과 같은 시절을 풍미한 또 하나의 명배우 이미숙이 신인시절 원미경을 보며 열등감을 느꼈다고 회상했는데 이 사진을 보면 충분히 그 말이 납득할만했다. 


원미경은 27세의 나이에 변강쇠 2를 촬영하였고 이런 걸작 포스터를 남겼다. 여기에서 잠깐 화제를 돌려보면 과연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의 주연을 맡은 여배우 중 원미경의 이 표정을 연기하여 이런 포스터를 남길 수 있는 여배우가 있을까? 전도연 정도를 제외하곤 어느 누구도 원미경의 옹녀 표정 연기의 절반만큼도 연기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전도연도 27살의 나이엔 영화에서 이 정도의 존재감을 보여주진 못했다. 


2000년대 이후 한국 연예계가 산업화가 되며 수많은 배우들이 데뷔, 스타가 됐고 천만영화라는 영화들이 매년 쏟아지고 있지만 그 많은 스타라고 불리는 여배우들 중 질적 향상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바로 그런 점에서 원미경이라는 대배우의 존재가 아쉬울 뿐이다.   

 

2. 산딸기 2

 


이 작품은 앞서 소개한 변강쇠 2보다 1년 앞선 1985년에 개봉하여 1980년대를 풍미한 또 하나의 여배우 선우일란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된 작품이다. 선우일란은 이 영화의 성공을 발판으로 많은 영화에 출연하며 농익은 연기를 보였으며 특히 군인들 사이에서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다고 회고한 적도 있다. 


내가 산딸기 2의 포스터를 보고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는데 앞서 소개한 변강쇠 2와는 반대의 이유에서였다. 변강쇠 2의 포스터는 그 어떤 설명조차 필요없는 여배우 원미경의 얼굴로 꽉 채워 감탄을 자아냈다면 산딸기 2는 포스터에 적힌 갖가지 문구들의 표현에서 박장대소와 함께 최고의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선우일란이라는 완전 신인인 여배우를 파격 기용하여(놀랍게도 영화 촬영 당시 선우일란은 여고생이었다. 영화가 잘되어 성공했으니 망정이지 잘못되었다면 선우일란의 인생은 나락으로 빠지고 영화제작자들은 줄줄이 쇠창살 안에 갇힐 뻔했다) 내놓은 작품이니 예비 관객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재미있는 설명과 표현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설명과 표현들이 얼마나 기발하고 재미있는지 한참동안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씩 살펴보겠다. 


우선 맨 위에 적힌 문장부터 살펴보면 ‘승화된 에로티시즘! 영화예술의 승리!’라고 표현했다. 이 영화는 에로티시즘을 표방한 영화임을 당당히 밝히면서 영화예술의 승리라고까지 표현했는데 이 문장을 본 내 느낌은 이 문장뿐만 아니라 포스터 안에 쓰인 곳곳의 문장들에서 이 영화의 감독이 이른바 자체역량 과대평가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영화를 찍은 의의를 ‘영화예술의 승리’라는 대단한 업적으로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포스터에서 가장 크게 웃은 문장은 좌측 상단에 적힌 ‘예술이었기에 용서받은 그 사실적 정사씬!’이었다. 
문장을 하나씩 살펴보면 우선 ‘예술이었기에’라는 표현이 눈에 띈다. 감독은 자신이 만든 작품이 예술임을 당당히 표방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 이어지는 말은 ‘용서받은’이라는 표현이다. 용서를 받았다면 그 주체는 무엇이며 누구에게 어떤 용서를 받았다는 것일까? 바로 이어지는 ‘그 사실적 정사씬!’이 용서를 받았다는 것이다. 즉, 정사씬을 찍어도 대단히 사실적으로 찍었는데 정사씬이 예술이었고 그래서 용서를 받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용서란 아마도 1980년대 사전검열했던 공연윤리위원회의 등급을 받아 영화간판을 걸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는 말일 것이다. 

 

산딸기 2에는 또 다른 포스터가 있다. 앞서 소개한 포스터에서보다 여배우 선우일란의 얼굴을 좀 더 어른스럽게 화장한 모습이 눈에 띈다. 또한 앞서 소개한 포스터에서 물속에 들어간 선우일란이 자신의 두 손으로 앞가슴을 가리고 있는데 반해 이 포스터에서는 아예 손을 내린 대신 '숲속의 요정 선우일란 찬란한 데뷰'라는 글을 쓴 큼지막한 직사각형으로 가슴을 가려 성적 상상력을 더해주는 센스까지 유감없이 자랑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자체역량의 과대평가가 이 문장에서 가장 화려하게 꽃을 피우고 있다. 자신들이 만든 작품이 예술이라는 자부심부터 사실적이고 대담한 정사씬을 담았는데 용서까지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실로 감탄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던 이 현란한 언어유희. 아! 1980년대 중반에 이런 위대하고 현란한 표현을 썼건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글쟁이들은 다들 어디에서 뭐하고 있기에 이런 표현을 다시 볼 수 없는 현실에 진한 아쉬움이 절로 생겨났다.


포스터에 적힌 온갖 현란한 언어유희적 표현은 감독의 자기소개에서도 빛나고 있다. 감독은 자신을 ‘관능밀엽꾼’이란 표현으로 소개하고 있다. 관능밀엽꾼. 이제껏 살면서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한 표현이었다. 관능(官能)을 밀엽, 즉 몰래 사냥한다는 뜻인가 본데 이 뜻을 알 수 없는 현란한 표현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이쯤에서 이 영화의 감독인 김수형 감독이란 분이 무척 궁금해져서 찾아 보니 무려 6편까지 이어지는 장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산딸기 시리즈 전체의 감독을 맡은 것 외에도 1980년대에 그의 표현대로 ‘승화된 에로티시즘’을 표방하는 많은 영화의 감독을 맡았다. 그런데 그 영화들의 제목 역시 현란한 언어유희를 유감없이 표방하고 있으니 ‘나는 할렐루야 아줌마였다’, ‘훔친 사과가 맛이 있다’, ‘누가 꽃밭에 불을 지르랴’ 등이 있다. 그리고 이 김수형 감독은 여러 TV 드라마에서 연기하는 현우라는 배우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요즘 쏟아지는 광고들을 보면 비싼 몸값의 연예인들이 모델로 나와 화려한 영상미를 뽐내긴 해도 이 화려함을 수식하는 기발한 표현은 너무 빈곤하다고만 느꼈는데 이 김수형 감독의 현란한 언어유희의 표현을 잘 공부하여 즐거운 기억으로 남는 기발한 표현들이 많이 생산되면 좋겠다는 바람도 가져 본다.  

Posted by sni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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