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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초월한 명작들의 공통점은 시대를 초월해야 마땅한 보편성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어떤 명작 속에서 등장하는 주인공은 또 다른 어떤 명작 속에 약간의 변형만이 있을 뿐 반드시 다시 등장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보편성이 존재한다는 그 이유 때문에 명작이란 시대를 초월하여 수많은 독자들에 의해 잊히지 않고 다시 읽히게 되기 마련이다. 

 


명작이 공유하는 ‘보편성’과 그 보편성이 불러오는 ‘인기’라는 측면에서 생각할 때 굳이 명작의 순위라는 것을 매긴다면 고금의 명작인 삼국지야말로 첫번째 순위에 올려야 할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무려 2천년 가까이 수많은 사람들의 손때를 타고 감동을 주며 인구에 회자되며 수많은 작품들에게 모티브를 제공하여 새롭게 재탄생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유비는 젊은 시절부터 웅대한 포부를 품고 숱한 고초를 겪다가 끝내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만 대망인 천하통일의 꿈을 이루지 못하는 동정심까지 불러 일으키는데 이는 수많은 전형적인 영웅담의 생애와 일치한다. 제갈량은 천재, 왕을 만드는 왕의 남자, 그리고 모시던 주인이 먼저 세상을 떠나도 충성심을 버리지 않아 그의 아들에게까지 변하지 않는 충성과 의리의 화신이 등장하는 작품의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모티브로 존재하고 있다. 또한 관우와 조자룡은 무신(武神), 진짜 멋진 사나이, 무사의 대명사로 불멸의 명성이 계속되고 있다. 

삼국지에는 유비, 제갈량, 관우, 조자룡이나 조조, 손권, 사마의 같은 삼국지를 잘 몰라도 웬만큼은 알만한 주연급 인물들 외에 어지간히 삼국지를 읽어 본 사람들이어야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유명하지 않은 인물들 중에도 굉장히 극적인 삶을 살았던, 창작의 모티브가 되는 인물들이 있다. 내가 꼽는 그 인물들은 남자 둘과 여자 둘, 모두 4명인데 남자 두 명은 하후패와 순의, 여자 두 명은 조조의 딸이자 후한의 마지막 황후인 헌목황후 조절(曹節), 그리고 조조의 며느리이자 후한의 뒤를 잇는 위나라의 첫번째 황후인 문소황후 견씨(甄氏)이다. 이들은 굉장히 극적인 삶을 살다 갔기에 작가적 상상력을 충분히 불러 일으키는 인물들이나 하후패, 순의는 그들이 살았던 시대적 배경이 하필 제갈량 사후의, 소설적 흥미가 매우 줄어든 시기를 살았기에 독자들의 주목을 받기 어려웠고 조절과 문소황후 견씨는 여성들, 그것도 유비의 일생과 무관했기에 삼국지 내에서 주목받기 어려웠던 점이 있다. 

이들의 살았던 삶의 행적과 함께 각각의 삶에서 나오는 작가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모티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번 포스트에서는 남자 두 명인 하후패와 순의를, 다음 포스트에서 여자 두 명인 헌목황후 조절과 문소황후 견씨의 생애를 알아보겠다. 

 

1. 하후패. 아버지와 형을 죽인 원수의 나라에 항복해야만 했던 파란만장한 불운아

 

(1) 최고 명문가의 아들. 하지만 복수심으로 가득 찬 불우한 젊은 시절

 

하후패는 조조가 청년시절 거병할 때부터 그를 따랐던 명장 하후연의 아들이다. 하후연은 젊은 시절부터 한중대전에서 전사할 때까지 군사를 이끈 최고의 무장 중 한 명으로 평가되는데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애꾸눈의 용장 하후돈의 용맹함은 실제론 하후연의 몫이었고 하후돈은 야전사령관과는 매우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이처럼 하후연은 젊은 시절부터 숱한 공을 세웠기에 수많은 관직을 역임하였고 특히 조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마초의 난을 진압하였고 한중을 차지하고 있던 장로를 평정하여 한중 바로 아래의 익주를 이제 막 점령한 유비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이처럼 혁혁한 공을 세우며 평생을 용장으로 빛나는 생을 살았던 하후연은 결국 한중공방전이라는 유비 일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조조가 직접 참전한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반면에 조조는 생의 마지막으로 참전한 전쟁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유비에게 참패하여 ‘계륵’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퇴각해야 했던 그 유명한 전투에서도 일선 최전방에서 싸우며 용맹을 발휘한다. 조조군의 또 하나의 명장인 장합과 함께 유비의 공격을 막던 하후연은 결국 유비의 주력부대를 지휘하던 천재 전략가 법정의 계략에 말려 명장 황충에게 사망한다. 

 

삼국전투기에 묘사된 하후연의 최후. 꽤나 멋있게 표현했다. 

 

삼국지 전체를 통틀어 봤을 때 하후연 정도의 경력과 공적을 쌓은 인물이 이처럼 난전 중에 사망한 예는 하후연이 유일하다. 물론 먼 훗날 하후연과 함께 대촉전선의 대들보였던 장합 역시 제갈량의 계략에 말려 전사 하나 장합의 전사는 약간 결이 다르다. 장합은 후퇴하는 제갈량의 복병을 의심하고 추격하기 싫지만 할 수 없이 사마의의 명령에 따라 추격하다 제갈량의 꾐에 빠져 그만 허벅지에 화살을 맞고 절명하고 만다. 어쨌든 이처럼 하후연이라는 대들보 같은 장군이 전사하며 조조군은 큰 위기에 빠지고 연패를 거듭하다 조조는 결국 패배의 쓴 맛을 보며 퇴각하고 만다. 바로 이때가 평생을 정처 없이 쫓겨 다니던 유비에겐 최전성기였고 이 기세를 몰아 그는 한중왕, 이어서 촉한의 황제가 된다. 
한중대전에서 아버지 하후연과 동생 하후영을 함께 잃은 하후패는 유비와 그가 세운 촉과는 불구대천의 원수로 살수밖에 없는 운명의 사나이였고 그 운명에 걸맞은 대단히 처절한 인생을 살아간다. 하후연은 모두 7아들을 두었는데 요절한 두 아들을 제외하곤 모두 위나라에서 관직을 역임할 정도로 있는 인재들이는데 유독 하후패만이 대촉전선의 전쟁터에 인생을 바쳤을만큼 처절했다. 위나라의 우장군이 되었고 최정예병인 정촉호군(征蜀護軍)을 맡아 누구보다 맹렬하게 싸웠다. 특히 제갈량 사후 촉의 군권을 강유가 쥐고 지속적인 북벌을 감행할 때엔 위나라의 또 하나의 명장 곽회와 함께 강유의 공격에 침착하게 대처하게 여러 번 막아내는 성과를 보이기도 했다. 

 

(2) 목숨을 걸고 원수국에 투항해야만 했던 기구한 삶

 

이처럼 아버지와 동생의 원수들의 침범을 잘 막아내며 혁혁한 전공을 세우며 위나라 군부내에서 승승장구할 것만 같았던 하후패의 운명에 또 한 번의 먹구름이 드리워진다. 바로 위나라 멸망의 시초가 된 고평릉사변이 터지며 위나라의 권력 전체가 사마씨 삼부자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조상과 그를 따르던 무리들은 팔족이 멸해지는 엄청난 피의 숙청을 당하게 된다. 이때 대촉전선의 국경을 방비하던 하후패는 조상과 모든 일당들이 참살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결국 다른 곳도 아닌 촉, 아버지와 동생의 원수국으로의 투항을 결심한다. 그때 그의 나이 이미 환갑이 넘은 노인이었다. 
당시 하후패는 휘하 군마를 이끌고 그 험준하기로 유명한 촉도(蜀道)를 거슬러 내려가는 일생일대의 모험을 하게 된다. 싸움에서 진 패잔병도 아닌 또 다른 몰골의 패잔병이 되어 노구를 이끌고 그토록 험한 촉도, 그것도 자신의 아버지와 동생을 죽였던 군사들이 행군했던 그 길을 스스로 투항하기 위해 거슬러 내려간 것이다. 그때 그의 심경이 어땠을까? 그간 그의 삶을 지탱해온 모든 가치관들이 송두리째 뽑히는 참담한 심정 아니었을까? 게다가 그는 자오도라는 곳에서 길을 잃어 일행들과 함께 굶어 죽기 직전까지 이르렀고 심지어 양식이 떨어져 말을 죽이고 도보로 걷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다리를 다쳐 바위 아래에 누워있는데 길을 찾아보았으나 어디인지 알지 못하자 이 소식을 들은 촉의 강유가 사람을 보내 하후패를 영접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이다. 

 

(3) 원수국의 선봉장이 되다

 

촉에 투항한 후 그는 무척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황제 유선부터 강유, 그리고 촉나라 군부의 중진이었던 장억 또한 그를 매우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벼슬은 황실의 종친들이나 맡는 거기장군에 이르렀다. 그렇지 않아도 인재가 부족한 촉나라의 입장으로는 적국인 위나라, 그것도 수십년 간 촉에 칼날을 겨눠온 중진 중의 중진이 제발로 걸어 들어왔으니 반갑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훗날 촉의 멸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위의 장군인 종회를 조심해야 한다며 경고했다는 일화도 있다. 
강유의 북벌에도 종군하는 선봉장으로 맹활약하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강유가 일으킨 여러 번의 북벌 중 최고의 대승으로 꼽는 전투가 바로 적도성 전투인데 이 전투에서 옹주자사 왕경의 군사가 수 만명이 전사했고 옹주 전체가 함락직전의 위기에 빠질 정도의 엄청난 타격을 가한다. 이때 강유가 올린 전과는 제갈량 시절부터 이어진 수 차례의 북벌 중 가장 큰 승리였고 이 공로를 인정받은 강유는 군부의 1인자인 대장군에 올랐다. 즉, 하후패는 아버지의 원수국에 투항하여 옛 동료와 부하들을 수 만명 죽이는데 혁혁한 전공을 세워 그가 새로 모시게 된 장군을 대장군에 이르는데 큰 공을 세우게 된 것이다. 이때 하후패의 마음속에 든 심정은 또 어땠을까? 전장에서 승전고에 맞춰 기뻐하는 수많은 장군과 병졸들 사이에서 손에 든 검을 번쩍 들어 올리며 함께 기뻐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혼자 남은 공간에서는 애써 피눈물을 참아내는 세월을 보낸 것은 아니었을까? 


(4) 복수의 화신. 하지만 이룰 수 없었던 회한의 생애


하후패는 촉에 투항한 후 중진급의 장군으로 맹활약하여 시호를 받기까지 했으나 생의 마지막을 어떻게 맞이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정사에서는 그의 죽음을 분명하게 기록하지 않았으나 삼국지연의에서는 북벌에 여러 차례에 걸쳐 참전하였고 복병들의 화살에 맞아 죽는 것으로 나와있다. 
하후패의 마지막이 어땠는지 간에 그의 인생 전체를 살펴보면 대상을 달리한 두 번의 처절한 복수심과 회한이 뒤얽힌 치열한 삶을 살다갔다고 표현할 수 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조조군의 명장으로 맹활약하던 하후연의 아들인 그는 어린시절부터 수많은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사는 남부끄럽지 않은 도련님, 귀공자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젊은 나이에 집안의 기둥이었던 아버지와 어린 동생을 전쟁에서 잃고 복수의 화신이 되어 평생을 아버지가 전사한 바로 전쟁터에서 보내기로 다짐한다. 하지만 정변의 희생자가 될뻔한 위기를 넘기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토록 원수로 여겼던 적국에 투항하게 되고 고국에선 버림받았으나 적국에선 환영받는 장군으로 탈바꿈하여 고국을 향한 또 한 번의 복수의 화신이 되어 혁혁한 전공까지 세우게 된다. 하지만 그가 목표를 달리하여 불태운 두 번의 복수는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젊은 시절 정촉호군의 대장으로 활약했으나 촉을 정벌하지 못했고 촉에 투항하여 위를 정벌하는 선봉장으로 앞장섰으나 위를 정벌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투항한 나라에서 가족들도 없이 홀로 말년을 보내다 쓸쓸한 최후를 맞게 된다. 
하후패의 생애를 더듬어 보면 창작으로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 중에서도 이렇게까지 극적인 성장과 말년을 맞이하는 사람은 드물다고 할 정도로 그는 대단히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갔다. 몇몇 모티브를 갔다 써도 TV의 장편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제격인 인물일 것 같다. 어릴적 크게 가업을 이룬 아버지가 경쟁사의 음모에 빠져 충격으로 쇼크사한 모습을 본 아들이 복수의 화신이 되어 가업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데 성공하나 다시금 내부 배신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 경쟁사에 중요 정보를 빼돌린 다음 경쟁사의 중역으로 거듭나는 극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 정도의 설정이 가능하지 않을까?

 

2. 순의. 아버지를 죽인 주인 가문을 향한 간접 복수


(1) 순욱. 끝내 버림받은 왕좌지재

 

순의는 위나라 건국의 일등, 아니 특등 공신인 순욱의 아들로 위나라에서 개국공신의 2세로 삼공(三公) 중 하나인 사공(司空)의 중책까지 역임한 인물이다. 조조는 순욱을 일컬어 자신의 장자방(전한삼걸 중 으뜸인 장량)이라고 칭했을 정도로 순욱을 아꼈고 순욱의 전략, 지혜에 의존하였다. 그가 비범한 인재가 될 가능성은 어릴적부터 드러났던 모양인데 하옹이라는 자가 왕좌지재(왕을 보필할 재능)를 가졌다고 평가했을 정도였다. 
순욱은 조조가 천하의 패자(覇者)가 되기 전, 북쪽으로 원소, 공손찬, 동쪽으로 도겸, 남쪽으로 원술, 서쪽으로 마등, 유표 등 사방팔방에 적들을 두고 있던 힘없던 시절에 다른 사람도 아닌 천하제일의 세력을 가진 원소의 진영에서 나와 조조에게 제발로 걸어 들어온 최고의 복덩어리로 조조의 미래를 보여주고 들려준 두뇌이자 눈과 귀였다. 잠깐 여기에서 조조의 사람들 가운데 순욱이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 그리고 순욱의 생애를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고 갈 필요가 있다. 조조의 세력 내, 더 나아가서는 조조와 조비가 세우는 위나라 내에서 순욱이 비치는 빛이 얼마나 강렬했고 그만큼 그의 그림자가 얼마나 컸는지 알아야 순욱의 아들인 순의의 삶도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조조의 사람들 사이에서 순욱이 차지하는 비중과 활약상은 하나하나 베껴 나가기도 벅찰 정도인데 큼직하게 나누면 첫째, 조조에게 앞으로 나아갈 길을 명확히 알려주고 그 길을 가기 위한 방법을 체계적으로 설명해주며 내부 세력들을 설득시킨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를테면 최강의 적인 원소와의 일전을 준비하기 위해 주변의 적들과 하나하나 싸워 이겨서 세력을 키우는 방법을 알려주었고 혹여라도 조조가 그들과의 싸움에 주저하는 기색이 보이면 적극적으로 설득하여 싸우도록 독려해주었다. 조조가 나가서 싸우는 동안 근거지를 굳건히 지켜 출전한 장군들과 병사들을 안심시킨 것과 동시에 조조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공신력과 함께 거부할 수 없는 권위를 따를 수 있도록 천자를 모시고(정확히는 품에 안고) 살도록 권유했다. 천자를 모신다는 행위는 까딱 잘못하면 전국 각지에 흩어진 제후들에게 제2의 동탁과도 같은 공동이 표적이 될 수 있는 대단히 위험부담이 큰 도박이었지만 조조의 결단력과 배짱은 결국 천자를 품에 안았고 이후 조조가 하는 모든 발언과 행동은 천자의 명령으로 둔갑하는 엄청난 효과를 누리게 된다. 
주변의 적들을 물리친 후 원소와의 피할 수 없는 일전을 앞두고 두려워하는 조조와 휘하 장군, 모사들에게 원소의 문제점을 하나씩 짚어가며 이런 이유로 반드시 이길 수 있다며 설득하는 대목에선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무서운 통찰력이 느껴진다. 원소의 세력은 법령이 정비되어 있지 않는 단점, 전풍은 강직하지만 윗사람을 거스르는 성격의 단점을 지적했고 그 외 허유, 심배, 봉기, 안량과 문추같은 기라성 같은 인물들의 단점 역시 정확히 간파하는데 놀랍게도 순욱은 원소 밑에 오래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그 얼마 안되는 기간 동안 겉으로 보기엔 인재의 산실 같은 원소의 부하들의 문제점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정확하게 잡아냈고 바로 이 점을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근거로 대며 조조에게 자신감을 북돋아 주었다는 점은 달리 그의 별명이 장자방, 왕좌지재가 아님을 알게 해준다. 
순욱이 조조와 그의 세력에게 끼친 영향 중 두 번째는 바로 함께 일할 사람을 추천하여 훗날 조조가 위나라를 세운 이후의 핵심중추가 될 인물들까지 영입하게 했다는 것이다. 

 

일명 순욱의 피라미드라 불리는 사람들. 순욱은 사람보는 눈이 누구보다 정확했고 그의 추천으로 끌어들인 인물들은 훗날 위나라의 중진들로 활약한다. 

 

후한 사회에서 관직에 등용되는 방법은 향거리선제라는 제도에 의해 지역의 명망을 가진 인사가 누군가에게 추천을 해주면 그 추천을 받아 벼슬을 주고 함께 일하는 식이었다. 이때 명문가인 영천 순씨 가문의 대표주자인 순욱의 추천을 받으면 중용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는데 순욱의 추천으로 조조에게 임관한 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보다 정확할 수 없을 정도로 한 사람이 가진 능력의 종류와 크기에 맞춰 추천을 하였고 조조는 그에 맞춰 그 많은 인재들을 자신의 밑에 둘 수 있었다. 특히 순욱의 가문인 영천 순씨라는 이 가문 자체가 당대의 지식인 집단의 대표격이었는데 순욱이 조조에게 임관하여 주변의 많은 제후들을 물리치고 당대 최고의 가문의 후손이자 최대 세력인 원소마저 무너뜨려 천하통일의 대부분을 조조에게 선물했다는 것은 달리 표현하면 영천 순씨로 대표되는 최고 지식인 집단과 영천 순씨와 연관된 수많은 지식인 집단이 조조의 품안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영원할 것만 같았던 조조와 순욱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하고 파국을 맞이하였다. 조조는 관도대전의 승리로 일생일대 최대의 적인 원소를 물리치는데 성공했고 요동땅까지 쫓아가 그의 세 아들까지 모두 죽여 후환을 남기지 않았다. 원소의 근거지였던 기주의 업성을 자신의 새로운 근거지로 삼고 천하통일을 위해 남은 자투리 땅들인 형주와 익주, 그리고 아기 호랑이 손권이 꿈틀대는 강동마저 잡을 부푼 꿈에 젖어 있었다. 이처럼 비록 미완이었어도 대업을 이루었으니 그 칼날 같은 판단력과 용인술을 무디게 한 것일까? 조조는 더 이상 쓴 소리와 충언을 멀리 하는 자만에 빠지기 시작한다. 한(漢)나라의 신하로 남지 말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라는 은밀한 아첨을 듣고 싶어했고 자신의 판단이 모두 옳다는 모순에 빠지기 시작한다. 바로 이때 순욱은 조조에게 대업을 일으킬 때의 초심을 잃지 말라는 간언을 하였고 이에 조조가 냉담한 반응을 보이며 순욱은 근심(실제론 실망과 허탈함이겠지만)에 빠져 결국 오래 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게 된다. 

 

고우영 화백의 만화 삼국지에 묘사된 순욱과 조조의 균열. 구석(九錫)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순욱의 고언을 듣지 않는 조조의 속마음이 비춰진다. 

 

버림받은 순욱. 죽기 전에서야 자신의 인생이 잘못 되었음을 뼈저리게 깨달은 순욱의 모습이다. 

 

관도대전에서 최대의 적 원소를 제거한 후 급자만해진 조조의 모습을 묘사했다. 하지만 그는 순욱 사후엔 두번 다시 순욱의 생전만큼 힘을 쓰지 못한다. 


순욱이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은 사서의 기록에 따라 제각각이다. 어떤 사서에서는 조조의 버림을 받을까 무서워 근심하다 죽었다고도 하고 또한 조조에게서 빈 그릇을 받자 빈 그릇의 뜻이 자살의 명령임을 알아챈 순욱이 자살을 택했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그 어떤 기록을 보더라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바로 조조가 순욱을 버렸다는 점이다. 또한 다른 사람도 아닌 순욱을 버릴 때엔 그때까지의 조조를 이끌어 왔던 칼날 같은 판단력과 예지력이 그만 엄청나게 무뎌졌다는 것이다. 그 좋은 예로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참패에 결정타가 된 황개의 사항계(詐降計) 역시 어린 아이도 속지 않을 잔꾀에 불과했으나 조조의 자만은 여기에 깜빡 속아 넘어가며 돌이킬 수 없는 자충수를 두게 된다. 
관도대전을 대승으로 이끌며 천하를 다 차지하 것만 같았던 조조는 이후 적벽대전에서 멸망 직전에 있던 유비와 단합되지 않은 강동의 신흥세력에 불과한 손권의 연합군에게 참패를 당하면서 천하통일을 눈앞에 둔 채 후퇴하게 되고 유비는 형주 남쪽을 차지하며 기사회생하고 손권은 강동의 호족세력을 단합하여 신흥군주로 우뚝 서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순욱 역시 적벽대전 참패 후 정확히 4년 후 조조의 버림을 받고 생을 마감하면서 조조는 2연타의 큰 충격을 입었고 다시는 천하통일을 위한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킬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만다. 물론 적벽대전과 순욱의 죽음 이후로도 여러 차례 군사를 일으켜 승리하긴 했으나 이는 조조입장에서 방어를 위한 것이었지 지방 세력을 선제공격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일으킬 순 없었다. 그리고 끝내 천하통일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만다. 


(2) 위나라와 개국공신, 그리고 그들의 2세 


순의는 앞서 언급했듯이 순욱의 아들로 위나라의 관료로 시작하여 위나라의 마지막 사공에까지 올랐고 위나라의 멸망 후 세워지는 진(晉)에서도 승승장구했던 인물이었다. 그럼 여기에서 잠깐 순의의 삶의 행적을 살펴보기 전에 위나라와 개국공신, 그리고 개국공신 2세들의 관계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조조의 패업을 도와 천하통일의 대부분을 이룩하게 도운 개국의 특등공신인 순욱은 냉정해진 조조에게 버림받은 채 예상치 못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그런데 문제는 순욱의 죽음이 조조의 세력에게 끼친 영향은 순욱 한 사람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순욱의 조조에게로의 임관은 순욱 한 사람만의 임관이 아닌 영천 순씨로 대표되는 최고 지식인 집단과 영천 순씨와 연관된 수많은 지식인 집단의 이동이었다면 순욱의 버림받은 최후 역시 이 결과를 고스란히 반대로 뒤집는 꼴이 되고 만다. 즉, 영천 순씨와 그와 연관된 수많은 지식인 집단의 마음 속에 ‘조조는 평생동안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불신의 싹이 트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집단 중에는 영천 순씨 가문의 추천으로 조조에게 임관한 사마의와 그의 두 아들이 있었고 그들 역시 순욱이 조조에게 이용되고 폐기 처분되는지 똑똑이 지켜보았다. 
개국공신들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불신은 대를 이어 개국공신의 2세들에게도 전해졌고 그 2세들 중 순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순의까지 갈 것도 없다. 순의가 보여준 행동은 버림받은 아버지를 향한 작은 복수라고 치부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앞서 언급한 하후패의 동생들 역시 사마씨에게 정권이 넘어간 이후에도 벼슬살이를 잘 했고 막내 동생인 하후화는 진나라에서까지 벼슬을 살았다. 
이처럼 위나라의 개국공신 2세들에게 유독 약한 충성심을 보이는 것은 바로 조조와 조비 부자가 개국공신들에게 보여준 용인술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조조의 용인술이 갖는 가장 큰 강점은 어떤 사람의 능력을 제대로 파악하고 능력에 맞는 자리에서 일하게 하여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조조는 한 사람의 능력 외엔 신분, 과거사 등을 묻지 않았고 그가 가진 능력으로 무엇을 얼마만큼 해낼 수 있을 것인가만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다. 하지만 여기에서 조조가 가진 크나큰 결점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포용, 관용의 부족함이었다. 조조가 쓰는 용인술은 사람을 마치 거대한 기계 속의 부품처럼 취급하는 실수를 범하기 쉬운데 조조 역시 마치 사람을 부품처럼 여기며 관용을 베푸는데는 인색했다. 하나의 부품이 녹슬거나 고장이 나면 바로 그 부품을 고치는 것보다 다른 부품으로 교체하면 훨씬 일의 능률이 잘 오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런 관용없는 용인술을 향한 반감(反感)은 개국공신들과 그들의 2세에까지 영향을 미쳐 초강대국처럼 보였던 위나라를 내부에서부터 곪아 터지게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삼국지에서 순의라는 인물의 지명도를 한 번에 올려준 일대 사건이 발생한다. 위나라 4대 황제인 조모 시해사건이다. 여기에서 잠깐 위나라 황제가 어떻게 교체되었는지의 과정을 짤막하게 알아볼 필요가 있다. 
사마씨 삼부자는 고평릉사변을 일으켜 조상의 편에 섰던 대신들의 팔족을 멸하는 피바람을 일으키며 정권을 잡은 후 황제 조방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버린다. 이에 조방은 나름 살길을 찾고 싶었는지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충의지사들과 사마사, 사마소 형제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으나 발각되고 결국 폐위된다(바로 이 대목에서 그 옛날 조조가 동승과 동귀비, 복완과 복황후를 죽였던 장면이 떠올라야 한다). 이후 사마씨 형제의 손에 의해 즉위한 새로운 황제가 13살짜리 촌뜨기 조모였다. 사마씨 형제는 조모를 손아귀에 넣고 천하를 주무를 생각이었으나 조모는 생각보다 똑똑한 아이였다. 몇 년간 사마씨 형제의 손에 놀아나 허수아비 노릇이나 하는 자신의 모습을 더 이상 참지 못한 조모는 결국 궁 안에서 사마소를 죽이겠다는 사생결단의 각오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거사를 행하게 된다. 얼마되지도 않는 궁 안의 군사들을 이끌고 친히 칼을 뽑아 들고 북을 치며 사마소를 손수 죽이러 앞장선 것이다. 조모는 끝까지 칼을 휘두르며 경거망동하는 자는 일족을 주살하겠노라는 서슬 퍼런 명령까지 내리며 끝까지 의기를 잃지 않았다. 죽음 앞에서도 의연한 한 청년의 모습을 상상하면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비장함이 절로 느껴진다. 
하지만 이미 천하대세가 사마씨에게 갔듯이 조모의 이런 행동 역시 결과적으로는 치기 어린 스무살 어린 아이의 최후의 발악에 불과했다. 사마소의 오른팔이자 훗날 간신의 대명사로 악명을 떨치게 되는 가충은 자신의 부하인 성제라는 자에게 조모를 주살하도록 명령하였고 이에 일국의 황제가 벌건 대낮에 일개 하급 무사의 창에 찔려 살인을 당하는 천인공노할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사마소 역시 상상치도 못한 일이 벌어지자 정신이 아득해지며 벌벌 떨었다고 전해진다. 
황제시해라는 이 엄청난 사건의 파장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세상 사람들이 사마소가 잠깐 쥐고 있는 권력에 무서워할 뿐 어느 누구도 마음으로 충성하는 이가 없는 대단히 취약한 권력으로 만들어 버렸고 두고두고 사마씨 가문에게 정통성과 명분의 부재라는 발목을 잡게 만든다. 
그 당시 위나라의 백성들의 생각은 어땠을까? 기록에 나와 있는 바로는 궁에서 상여가 나갈 때 볼품없는 수레가 몇 대 따랐고 깃발도 없는 모습을 본 백성들은 누구할 것 없이 분노하고 슬퍼하였다. 비록 위나라를 향한 충성심은 약했을지 몰라도 황제라는 직분을 떠나 고작 스무살의 어린 청년이 벌건 대낮에 말도 안되는 죽음을 당한 것을 아는 백성들이 분노와 슬픔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그뿐 만이 아니었다. 사마소가 가장 아끼는 그의 양신(良臣)이자 위나라 개국공신 진군의 아들인 진태는 조모의 시신을 끌어안고 대성통곡하며 그의 충성심을 보였다. 진태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당황한 사마소는 평소 그토록 믿었던 진태와 상의하고 싶어 긴급회의를 열었으나 진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이 대목에서 그 전까지는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살던 순의가 모습을 드러낸다. 사마소는 진태의 외삼촌인 순의에게 진태를 끌어오라는 명령을 내렸고 결국 진태에게 가자 진태는 이런 외삼촌을 보며 ‘세상 사람들이 저와 외삼촌을 견준다지만 오늘의 외삼촌은 저보다 못한 인간이 되었습니다’라며 길게 한탄하였다고 전해진다. 사마소는 회의장에 끌려온 진태를 조용히 불러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냐고 극히 원시적인 질문을 하자 진태는 가충을 죽여야 그나마 천하에 사과하는 길이라는 지극히 원론적인 답을 내놓았고 다른 방법이 없겠냐고 재차 묻자 그 이상은 있어도(즉, 사마소 니가 죽어야 한다) 그 이하는 없다는 당찬 답변을 내놓는다. 그리고 목숨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던 진태의 훗날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다. 그저 조모가 죽던 그 해에 죽었다고만 나올 뿐이니 그의 최후가 어땠는지는 어렵기 않게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황제 조모의 시해 사건 이후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과 관련인물들의 모습을 하나씩 살펴보면 위나라의 건국에 특등 공신이었으나 결국 버림받고 쓸쓸한 최후를 맞이한 순욱과 그의 아들 순유의 엇갈리는 행보는 극적인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 누구보다 뛰어났고 존경하는 아버지가 한 야심가의 손에 이용당하고 버림받는 과정을 지켜보며 마음속으로 칼을 갈고 있던 아들의 모습을 떠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순의가 보여준 행동들은 적극적인 의지의 표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기엔 많이 부족해 보인다. 이를테면 앞서 언급한 하후패는 사마씨 부자에 의해 정권이 넘어가고 자신의 버팀목인 조상 일당이 주살당하자 촉으로 투항, 망명할 결심을 세우고 그 험하기로 유명한 촉도를 넘는 일생일대의 모험까지 단행한다. 이후 촉의 거기장군이 되어 자신을 버린 위나라를 향한 또 한 번의 복수를 불태우는 그의 인생은 처절하면서도 처연함까지 느껴진다. 그 반면 순의는 그저 휩쓸려 가듯 위나라 조정에서 주는 벼슬살이를 잘 하다가 20세 어린 청년이 말도 안되는 꼴로 벌건 대낮에 죽어나가는 꼴을 보고서도 그저 새로운 권력에 붙어 살기에 급급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순의의 삶을 간략하게 표현하자면 외조카에게마저 무시와 한탄을 당해도 싼 나약한 의지의 인간임과 동시에 아버지 순욱과는 차마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로 호부견자(虎父犬子)의 표본 같은 인물이라고 평하고 싶다. 

 

3. 하후패와 순의의 삶을 살펴보며 든 생각 

이번 포스트에서 소개한 하후패와 순의의 삶에서 떠올릴 수 있는 단어들은 배신, 사랑, 야망, 회한, 분노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유비와 그를 따르는 집단의 사람들에게서는 충성, 의리, 신뢰가 떠오른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위나라의 개국공신 2세들에게 유독 약한 충성심을 보이는 것은 바로 조조와 조비 부자가 개국공신들에게 보여준 용인술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조조의 용인술이 갖는 가장 큰 강점은 어떤 사람의 능력을 제대로 파악하고 능력에 맞는 자리에서 일하게 하여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조조는 한 사람의 능력 외엔 신분, 과거사 등을 묻지 않았고 그가 가진 능력으로 무엇을 얼마만큼 해낼 수 있을 것인가만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다. 하지만 여기에서 조조가 가진 크나큰 결점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포용, 관용의 부족함이었다. 조조가 쓰는 용인술은 사람을 마치 거대한 기계 속의 부품처럼 취급하는 실수를 범하기 쉬운데 조조 역시 마치 사람을 부품처럼 여기며 관용을 베푸는데는 인색했다. 하나의 부품이 녹슬거나 고장이 나면 바로 그 부품을 고치는 것보다 다른 부품으로 교체하면 훨씬 일의 능률이 잘 오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런 관용없는 용인술을 향한 반감(反感)은 개국공신들과 그들의 2세에까지 영향을 미쳐 초강대국처럼 보였던 위나라를 내부에서부터 곪아 터지게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 반면 유비의 용인술에서는 조조에게는 없는 포용과 관용이 있다. 유비는 자신을 따르는 인재의 수가 적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모든 것을 던지는 삶을 살았고 바로 이 점에 감동한 부하들은 죽을 때까지 그에게 충성을 다짐하였다. 그 좋은 예로 이 글에서 소개한 하후패, 순의와는 정반대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황권, 황숭 부자가 있다. 이릉대전에 참전한 황권은 이릉대전 참패 후 퇴로가 막히자 어쩔 수 없이 위나라의 조비에게 투항했고 이에 조비는 황권에게 유비가 황권의 가족들을 몰살시켰다는 거짓을 말하자 유비가 그럴리 없다며 적극 부인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어지간히 강한 유대감으론 설명할 수 없는 신뢰와 충성심이다. 실제로 유비는 황권을 용서해주었고 황권이 촉에 남겨두었던 아들 황숭 역시 관직에 오르게 하였다. 결국 황권은 위나라에서 살다가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아들 황숭은 대를 이어 충성을 바쳤고 촉의 멸망을 앞두고 제갈첨(제갈량의 아들)이 구성한 최후의 결사대에 합류,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한다. 
이문열 작가의 평역 삼국지에서는 유비의 삶을 '중국 역대 왕조의 창업자 중에서 그만큼 해놓은 일에 비해 민중의 사랑을 받은 사람도 아마 없을 것'이라는 전제하였고 이에 유비를 분석, 설명하는 장문의 글을 썼다. 그 중 눈길이 가는 문장은 '유비가 이끄는 집단은 제도나 법보다는 의리와 인정 같은 임협적 원리에 지배된 사조직에 가까웠고 이것은 수백 년 부패한 한의 관료제에 시달려 온 민중들에게는 호감이 갈 수도 있었겠다는 분석을 한 부분이다. 또 하나의 문장은 '유비는 어떤경우에도 사람을 희생시키는 법이 없었고, 그게 그가 이끄는 집단의 결속을 남달리 굳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러한 인적 결속은 은연중에 민중들에게도 전해져 그와 그의 집단에 남다른 호감을 가지게 했을 것'이라는 부분이었다. 이문열 작가가 유비를 분석한 이 문장들에서 크게 공감하는 지점이었다. 후한 말기 황건적의 난과 지방 제후들의 난립, 매년 이어지는 흉작과 수확량 감소로 그렇지 않아도 힘든 민중들의 삶에 법치주의적 관료제는 더욱 더 삶을 지치게 만들었기에 유비와 같은 의협집단의 논리가 오히려 더 큰 공감을 얻을 수 있다. 또한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을 버리는 법이 없다는 믿음은 신야성 공격 때 수많은 백성들이 죽을 줄 알면서 유비를 따라나서는 기적의 행렬을 보여주기도 했다. 조조와 그의 집단으로서는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소름돋는 장면이었으리라. 괜히 젊은 시절의 조조가 아무것도 없는 유비에게 '세상의 영웅은 나와 그대뿐'이라는 말을 했고 조조의 칼날같은 판단력의 모사들, 정욱, 곽가, 유엽 등이 유비를 경계하라고 충고한 것이 아닌 것이다. 

 

 

 

 

Posted by sni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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