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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본인이 2007년 7월 15일에 인터뷰365라는 매체에 기고했던 글임. 각종 웹사이트에 퍼진 똑같은 내용의 글은 인터뷰365를 통해 여기저기 퍼진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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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로비츠는 20세기를 살았던 피아니스트 중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인물이었다. 이 명제는 참이다. 호로비츠만큼 많은 연주회를 다니면서 가는 곳마다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인물은 없다. 하지만 호로비츠가 20세기를 살았던 피아니스트 중 가장 위대한 삶을 살았던 최고의 아티스트였다. 이 명제가 참이라고 동의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반반 정도가 될 것이다. 그만큼 호로비츠는 많은 이들의 인기를 받기 힘든 클래식 음악이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받게 하였고 그 인기를 바탕으로 화려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긴 했어도 그가 수많은 피아니트스 중 가장 위대한 삶을 살았던 훌륭한 피아니스트였다고 보기엔 힘든 점이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삶을 살았던 피아니스트. 어찌 보면 사람 잡는 소리 같은 이 애매한 말 한 마디를 놓고 호로비츠를 하나씩 분석해본다. 훌륭한 음악가를 판단할 수 있는 몇 가지 판단기준을 한 번 상정해본다면

첫째, 곡의 완벽한 해석과 그 해석을 위한 예술적 영감, 기교.
둘째, 대중적 흡입력
셋째, 레퍼토리의 다양성

이상의 세 가지를 놓고 보았을 때 호로비츠는 대중적 인기를 한 몸에 얻을 수 있었던 엄청난 기교를 자랑했던 인물이었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으나 다른 면에 있어선 혹평을 면치 못했었다. 때론 ‘악기를 다루는 기교가 음악적 이해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대표적 사례’라는 혹평을 받기도 했고 그가 다루는 작곡가별 레퍼토리는 거장이라고 할 수 있는 수많은 피아니스트 중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편협하다. ‘호로비츠를 위하여’라는 영화의 제목으로도 널리 알려진 그 이름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어떤 삶을 살았고 왜 그렇게 살아야 했으며 왜 그가 논란의 대상이 되는지에 대해 살펴본다.

희비가 교차했던 유소년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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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로비츠는 1904년 우크라이나의 키에프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집은 상당히 부유했고 그의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다. 그의 음악적 재능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나 보다. 6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그의 재능은 남달랐다고 한다.

호로비츠의 꿈은 작곡가였다. 하지만 그 꿈꾸었던 작곡가로서의 미래와 그의 소년시절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사건이 터졌으니 바로 1917년의 볼세비키 혁명이었다. 볼세비키 혁명으로 인해 그의 집은 완전히 거덜나게 되었고 작곡가를 꿈꾸었고 그저 교양으로 피아노를 배웠던 호로비츠는 어쩔 수 없이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피아니스트가 직업이 되고 마는 것이다.

18세의 나이에 성공적인 데뷔를 하였고 20살엔 레닌그라드에서 25회의 연주를 할 정도였으니 이때부터 그는 러시아에서 주목 받는 피아니스트가 되었고 이듬해엔 독일의 베를린에 상륙하여 그의 이름을 러시아가 아닌 외국에 처음 알리게 되었다. 이때의 레퍼토리는 너무도 유명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다른 피아니스트의 대주자로 나와 연주를 한 호로비츠는 이 공연을 통해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작은 체구와 날카로운 눈빛의 한 청년이 선보이는 살인적인 기교. 마치 악마의 혼을 빌려 연주하는 듯한 공포의 연주는 보는 이들의 혼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참고로 역대 피아니스트 가운데 난곡 중의 난곡인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가장 잘 연주하는 연주자가 바로 호로비츠였다. 그가 녹음한 1941년의 음반을 들어보면 과연 이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연주가 맞나 싶을 정도로 입이 떡 벌어진다.

그리고 그의 나이 24세인 1925년에 드디어 미국으로 상륙하게 된다. 미국에서의 데뷔곡 역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이었다. 영국의 지휘자 토머스 비첨과의 협연을 통해 호로비츠는 자신의 명성을 미국에까지 알릴 수 있었고 너무도 화려하게 데뷔하게 된다. 그리고 제2의 인생을 미국에서 맞이하게 되고 미국에서 그의 삶을 마감하게 된다.

신천지 미국에서의 거침없는 성공신화

사용자 삽입 이미지청년 호로비츠의 인생을 바꾼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세기의 대 지휘자 토스카니니. 호로비츠의 인생을 통틀어 토스카니니를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지대하다.

미국에서 화려한 데뷔를 한 호로비츠. 그가 연주한 살인적인 기교의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들었던 미국인들의 반응은 경악과 충격 그 자체였다. 당시 미국의 언론에선 ‘회오리’, ‘고삐 풀린 코자크인’이라는 표현을 쓰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성공적인 데뷔를 거친 호로비츠의 인생은 그때부터 탄탄대로였다.

그렇다면 과연 호로비츠는 그만의 능력과 재능으로 전 미국을 통틀어 가장 유명하고 인기 있는 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었을까? 결코 그렇진 않다. 호로비츠의 실력이야 당대 최고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나 그 정도의 위치에 오르기까진

1. 그 자신이 지니고 있는 엄청난 재능
2. 그가 살았던 미국이라는 지리적 요건
3. 문화예술계에서 유럽(특히 러시아)에 비해 상대적 열등감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미국의 시기적 요건

이 세 가지 요건이 절묘하게 맞물려 있었음은 자명하다. 그는 러시아에서의 궁핍한 생활을 벗어나기 위해 해외로 눈을 돌렸고 특히 미국이라는 문화적 불모지, 신천지에 착륙하였기에 그만큼의 신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또한 문화예술의 본류인 유럽에 비해 상대적 열등감이 심했던 미국에서, 특히 이념과 체제의 양대 라이벌이었던 러시아에 비해 심한 열등감을 느꼈기에 러시아 출신의 젊은 청년 호로비츠의 미국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역으로 말해서 호로비츠가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 망명을 했더라면, 또한 러시아 출신이 아니었다면 그만큼의 성공 신화를 이룩할 순 없었을 것이란 가정도 충분히 가능하다. 

또 하나. 그가 그만큼의 신화적인 인물로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엔 그가 가지고 있던 탄탄한 인적 네트워크가 있다. 호로비츠의 인생을 바꿔준 두 명의 조력자, 바로 이탈리아 출신의 당대 최고의 지휘자였던 아르투르 토스카니니와 러시아에서 난리를 피해 망명한 작곡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였다.

당대 최고의 지휘자로 그 명성을 전 세계에 알리고 있던 토스카니니는 무솔리니의 파시즘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강단있는 행동을 하였고 그 대가로 미국으로 망명을 해야만 했다. 토스카니니의 명성은 미국에서도 당연히 이어졌는데 미국에선 그를 모셔오기 위해 그를 위한 조직인 NBC 오케스트라를 만들었다. 어쨌든 호로비츠는 이처럼 명망 있는 인사인 토스카니니를 1933년에 처음 만나게 되었고 그 해에 그의 딸인 완다 토스카니니와 결혼하게 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호로비츠와 그의 부인 완다 토스카니니. 아버지를 닮아서 그런지 강렬한 인상이 얼굴에 그대로 남아있다.

자신이 갖추고 있는 뛰어난 재능에 더해서 미국이라는 나라의 지리, 시기적 요건까지 맞아 떨어졌고 게다가 당대 최고 지휘자의 사위가 되는 인적 네트워크까지 형성한 호로비츠. 이런 그가 성공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노릇이었다.

호로비츠의 음악적 영감에 큰 영향을 준 또 하나의 인물은 달리 설명할 필요도 없는 러시아 출신의 위대한 작곡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였다. 볼세비키 혁명을 피해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고독한 천재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의 고국에서 자신의 뒤를 이어 망명한 재능 있는 청년인 호로비츠를 항상 아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호로비츠는 라흐마니노프에게 항상 무한한 존경심을 보냈고 평생동안 라흐마니노프의 곡을 주요 레퍼토리로 연주하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왼쪽의 꺽다리는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가운데 콧수염을 기른 신사는 월트 디즈니. 그리고 오른쪽이 호로비츠. 호로비츠는 운도 좋다. 혈혈단신 미국으로 건너와 이런 유명인사들의 이너서클에 편입될 수 있었으니 말이다.

1933년에 토스카니니의 사위가 되어 또 한 번 만인의 주목을 받았던 호로비츠. 거침없이 그저 성공가도만을 달리면 되는 그에게도 몇 차례의 시련이 있었다. 이러한 시련이 예기치 못했던 외부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면 불행, 불운이라 하겠으나 그 자신의 의지에서 비롯된 은퇴가 바로 그것이었다. 혈혈단신 미국에 건너온 이후 숱한 연주회를 다니며 쌓였던 정신적, 육체적 피로에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또 음악적 영감을 얻기 위해 재충전의 필요했고 이에 1936년부터 1939년까지 3년간 잠정적인 은퇴를 하였다.
3년의 잠정적 은퇴 이후 파리에서 성공적인 데뷔무대를 가진 호로비츠는 이후 1940년대 초부터 1950년대 초까지 약 10여 년간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호로비츠가 남겼던 주옥 같은 음반들의 대부분은 이 당시에 나온 것들이며 그의 장인 토스카니니와 함께 협연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 음반은 이 곡을 이야기 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명반이다.

호로비츠는 1953년에 두 번째 은퇴를 하게 된다. 이때의 은퇴기간은 꽤나 길었다. 무려 12년간 연주회를 갖지 않았으며 이후 12년만의 공백을 깨고 복귀한 카네기 홀에서의 무대는 전 미국에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이후 두 번의 은퇴와 복귀를 더해 모두 네 번씩이나 은퇴와 복귀를 번복하게 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12년 만에 가진 카네기 홀에서의 복귀무대를 녹음한 라이브 음반.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끊이지 않는 열광적인 분위기가 그저 스피커로 듣고만 있어도 전해진다.

여기에서 잠깐 그의 은퇴와 복귀의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면 과연 네 번씩이나 행한 그의 은퇴와 복귀가 음악적 영감의 재충전이라는 순수함만으로 설명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선 그는 성격적으로 무척 세심하고 괴팍한 면이 있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무대공포증도 있었다. 은퇴를 했다고 해서 완전히 연주를 중단하고 피아노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것은 아니었고 음반 레코딩은 꾸준히 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그가 네 번씩이나 했던 은퇴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케 한다.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던 호로비츠가 그의 인기를 한 번쯤 확인 받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 신비주의 전략, 그 신비주의 전략에서 비롯된 몸값 높이기의 상술. 이렇게 보면 그에 대한 지나친 편견일까? 한 시대를 살았던 위대한 예술인에 대한 모독일까?

Posted by sni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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