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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1차원적이고 편중된 시각만으로 평가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그 누구도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의 7정(7情)을 갖고 살기 마련이며 그 7정이 교차하며 때론 기뻐하고 때론 분노하고 또 때론 슬퍼하며 번뇌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람은 누구든 입체적 감정과 사고를 가지고 행동하며 살다가 죽기에 한 사람을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이 평가할 땐 대단히 조심스럽고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가까운 예를 들자면 21세기 한국을 살릴 위대한 과학자로 평가받았던 황우석 역시 그렇다. 아직도 황우석을 위대한 과학자로 평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희대의 사기꾼으로 욕설을 퍼붓는 사람 또한 부지기수이다. 뿐만 아니라 폐허가 된 조선조의 중흥을 일으킬 뻔 했으나 패륜의 죄를 짓고 왕좌에서 쫓겨난 광해군, 그리고 고려 공민왕 때의 요승(妖僧) 신돈의 역사적 평가 또한 나날이 새로운 각도로 보고 평가하는 것이 그 좋은 예라 할 것이다.

20세기의 가장 유명하고 가장 성공한 지휘자인 카라얀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처럼 긴 서문을 쓰게 되었다. 20세기 클래식 음악사에서 카라얀만큼 다양한 평가를 받고 호불호가 명확히 엇갈리는 지휘자 또한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이는 그만큼 카라얀이 남겼던 화려하고도 빛나는 삶의 족적이 대단히 컸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빛이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그가 드리운 그림자의 길이 또한 길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20세기를 살았던 지휘자 중 가장 유명하고 가장 성공한 지휘자. 가장 많은 돈을 벌었고 오만에 가까운 자신감이 넘쳐흘렀으며 어느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개발하여 보수일색인 클래식 음악계에 혁신을 불러일으킨 지휘자. 그가 있었기에 유럽의 몇몇 나라에서 살았던 작곡가들이 작곡한 음악이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수많은 사람들에게 마음의 양식이 되었다는 것만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삶의 궤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신의 출세를 위해 그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지나친 야심가였고 그 야심 때문에 변절을 했고 좌절도 겪어야 했다. 그는 참으로 많은 재주를 지니고 그 재주를 통해 끝없이 비상했던 훌륭한 지휘자였지만 또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잡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지휘자이며 예술혼을 상실한 장사꾼에 불과하다는 매서운 혹평도 들어야 했다.

그렇다면 카라얀이 과연 어떤 사람입니까? 하는 질문을 내게 던진다면 난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난 한 마디로 이렇게 답하겠다.

'좋아할 순 없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유일한 지휘자가 카라얀입니다. 그와 같은 인물은 아마 두 번 다시 나올 수 없을 겁니다.'


카라얀이 태어난지 100주년이 되었다며 클래식 음악시장에선 여기저기에서 화제를 불러일으키려는 움직임이 보인다. 아무리 클래식 음악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카라얀이라는 이름 정도는 들어보았을 것이고 이름은 몰라도 어디에선가 벽에 붙은 사진 한 장 정도는 반드시 보았을 법한 그 이름 카라얀. 그가 태어난지 100주년이 된 해라면 클래식 음악계에서 카라얀 마케팅만큼 좋은 호재는 또 없을 것이다.

결코 좋아할 순 없겠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유일한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그에 대해 긴 이야기를 시작해본다.

성공을 위해 달린 삶. 그리고 성공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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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을 지긋이 감고 힘있는 포즈로 지휘하는 모습. 카라얀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만의 트레이드 마크이다. 그는 대중에게 어떤 음악을 들려줄 것인가에 대해서도,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에 대해서도 너무 잘 알고 있었고 아는만큼 완벽하게 실천에 옮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카라얀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20세기가 배출한 지휘자 중 가장 유명하고 가장 성공했으며 가장 혁명적인 지휘자였다. 그는 유럽의 몇몇 나라에서 만든 음악을 그들만의 전유물이 아닌 전 세계적으로 보급하는데 있어서 누구보다 큰 공로를 세웠으며 바로 그가 있었기에 클래식 음악이란 장르가 현대에 있어서도 숨쉬며 생명력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성공을 위해 자신을 불태웠고 그 과정 속에서 치명적인 오점 또한 많이 남겼다.

20세기 클래식 음악계의 황제로 장기집권하며 화려한 삶을 살았지만 나치에 자진 입당하여 부역한 변절자로서의 삶 또한 카라얀이 살았던 삶이었고 세 번씩이나 결혼했고 그 결혼 또한 자신의 성공을 위한 발판으로 삼았던 것도 그의 삶이었다. 또한 대중의 인기에 지나치게 영합하여 상술만이 앞선 사람이라는 혹평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이처럼 그의 삶은 20세기 초 두 번의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에 유래 없는 어지러운 시대를 살아야했던 예술가들이 겪은 거친 바다와도 같은 질곡, 삶의 스펙트럼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카라얀은 1908년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서 외과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클래식 음악의 본령인 오스트리아, 그것도 모차르트의 고향인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적 잘츠부르크에 있는 모차르테움에서 피아노를 배우며 매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어릴적부터 음악에 열중하였으나 애당초 그가 음악가가 되겠다는 적극적인 의지는 없었다. 그의 형이 공대에 입학하는 것을 보고 그 역시 형을 따라 비엔나 공대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공학도가 되기 위한 소질이 없는 것을 깨닫고 그는 공대를 그만 두고(이 대목에서 한 마디. 카라얀의 이와 같은 결정은 백 번, 천 번 잘한 일이다. 때론 미친척하고 질러보는 것도 인생을 살아가는 좋은 방법이다. 이공계에 적응 안되는 젊은이들은 고민만 하지 말고 어서 빨리 진로를 바꿔라. 이 분야에서 10년 넘게 밥먹고 사는 연구원의 진심어린 충고이다) 다시 음악가가 되겠다는 꿈을 키우기 시작한다. 비록 그가 공대를 그만 두었으나 공학을 배운 것은 향후 그의 음악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팩터로 작용한다. 그는 음악예술에 치밀함이 생명인 공학적인 마인드를 도입하여 음향기술, 녹음기술 등에서 최대한의 상승작용을 이끌어내는데 훌륭하게 성공한다.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아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으나 그에겐 피아노보다 지휘자의 자리가 더 어울렸다. 모차르테움 시절의 스승인 파움가르트너는 그에게 지휘자가 될 것을 권유하였고 카라얀은 이제 지휘자가 될 꿈을 갖게 된다.

1929년부터 본격적으로 지휘자의 길에 들어선 카라얀은 그의 고향에서 성공적인 데뷔 무대를 갖게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불과 21세.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화려한 삶을 살았던 지휘자의 출발점은 바로 이 곳이었다.

젊다 못해 어린 지휘자인 카라얀. 그의 신분은 정식 상임지휘자가 아닌 연습지휘자였다. 아직은 나이, 실력, 경력 등 모든 면에서 출세하기 힘들었던 시기의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지휘자는 당대 최고의 지휘자인 토스카니니였다. 토스카니니가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참가하여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를 지휘한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자전거를 타고 멀고도 먼 거리를 이동하여 토스카니니를 직접 보는 행운을 얻게 된다. 역시 성공하는 사람은 뭔가 달라도 다르다. 자전거를 타고 그 거리를 이동할 생각을 하다니 말이다.

1933년. 독일 전체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던 나치. 카라얀은 나치에 자진 입당하게 된다. 이 역시 성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고 않고 달려드는 그의 성격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으며 카라얀의 인생에서 가장 큰 오점 중의 오점으로 남게 된다. 나치에 입당한 카라얀은 그의 바람대로 승승장구하게 된다. 나치치하의 독일에선 유능한 유태인 음악가들이 추방당하거나 망명하고 있는 판국에 조금은 덜 유능하더라도 나치에 자진입당까지 한 카라얀이 두각을 나타낼 수 있음은 당연한 것이다.

성공의 댓가로 영혼을 넘긴 파우스트


젊은 시절의 카라얀. 나치 치하의 파리에서 나치의 장교들과 바그너의 며느리를 앞에 두고 힘찬 모습으로 지휘하고 있다. 지휘하는 곡은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그의 인생과 가장 닮아있는 작곡가의 곡을 지휘하고 있는 것이다.

카라얀을 두고 20세기 음악사의 멤피스토, 일신의 성공을 위해 영혼까지 팔아넘긴 출세지상주의자라는 혹평을 한다. 그만큼 그는 성공에 지나치게 집착했고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 나치에 자진 입당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지만 그는 입당시기를 속이며 형량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이토록 혹평, 지탄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뭘까? 이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나치에 자진 입당한 점. 어쩔 수 없이 부역행위를 했던 수많은 예술가들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2. 세 번의 결혼을 한 점. 세 번의 결혼 모두 자신의 성공을 위해 전처를 헌신짝처럼 버렸다는 점.
3. 지나치게 상업적이고 인기에 영합하는 음악만을 만들었다는 점. 예술가를 위장한 장사치가 되었다는 점.


그렇다면 이 세 가지의 쟁점에 대한 반론 또한 가능하다.

1의 반론. 나치에 부역한 행위는 그 당시에 살았던 수많은 예술가들이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택한 길이었다. 물론 자진하여 입당했다는 점에서 더 죄질이 나쁘지만 말이다. 그러나 왜 그가 그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알아보면 그만큼 그는 성공에 목말라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음악을 하고 싶었고 그의 음악을 널리 알려 출세하고 싶었다. 음악을 하기 위해 그는 나치에 입당했고 나치의 정책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만큼의 야심만만한 인물이라면 나치보다 더한 것이라도 손잡고 성공의 발판으로 삼았을 것이다.
또한 그에겐 적이 많았다. 그는 최고의 자리에 앉고 싶었으나 당대 최고의 지휘자였던 양대 거목인 토스카니니와 푸르트벵글러가 앞길을 막고 있었고 그들의 시대가 저문 후 그들은 다른 인물들을 후계자로 점찍어두고 있었다.
나치에의 부역행위는 카라얀에게 있어서 옳지 않은 일이지만 어쩔 수 없이 한다는 죄책감보다는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작은 죄책감 따윈 마음에 두지 않겠다는 의지가 더 강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2의 반론. 자신의 성공을 위해 좀 더 나은 여자를 찾아서 세 번이나 결혼한 점. 이 부분은 사실 비난받아 마땅하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부분에 있어서는 그 누구도 카라얀에게 관대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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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얀의 세번째 부인인 엘리어트 무레와 두 딸의 모습. 카라얀은 전직 모델출신인 무레와 세 번째 결혼을 했고 이후엔 또 다시 결혼을 하지 않았다.

3의 반론. 카라얀이 예술의 영역을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이용했다는 점은 부분적으로는 동의할 수 있지만 전적으로 동의할 순 없는 부분이다. 그가 있었기에 수많은 작곡가들의 곡이 레코딩되어 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었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클래식 음악이란 딱딱하고 보수적인 분야에까지 관심을 둘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카라얀이 준 혜택이라고 표현한다면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그 혜택을 무척 많이 본 사람 중의 하나이다.
만일 그가 아니었더라면 지금까지도 클래식 음악이란 분야는 유럽의 몇몇 나라에서 시간많고 돈많은 귀족들이 공연장에서 즐기는 그들만의 전유물이 되었을 공산이 크다.

카라얀에 대한 평가는 어떤 사람이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른 주관적일 평가일 뿐이다. 이에 대한 명쾌한 해답이란 있을 수 없다. 즉, 그를 바라보는 평가는 옳다 또는 그르다의 사실 평가가 아닌 가치평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황제의 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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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얀은 CD가 처음 개발되고 향후 음악시장을 지배할 기록매체로 개발될 것임을 너무 잘알고 있었다,. 소니와 필립스가 개발한 CD란 매체에 대해 카라얀은 많은 조언을 했고 세계적인 보급화에 큰 공헌을 했다. 카라얀의 오른쪽은 소니사의 대표 모리타 회장, 왼쪽은 필립스 음악사의 사장 Joop van Tilburg.

카라얀의 장점이자 단점인 특징을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시대의 흐름을 잘 읽고 이를 잘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현재의 상황을 파악하여 미래를 예측하는데 있어서 동물적인 감각을 타고났고 이를 잘 활용하여 성공을 위한 발판으로 삼는데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나치의 시대가 오면 그것이 옳지 않아도 대항하지 않고 순응하여 성공을 위해 타협했고 훗날 그 나치에 의해 좌절을 겪었어도 악보를 공부하며 재기의 발판을 다졌다.

음반시대가 활성화 될 것을 누구보다 먼저 감지하여 그에 적절한 변화를 시도하여 훌륭하게 성공하였고 영상물의 시대에도 가장 먼저 발맞춰 지극히 화려한 영상물의 시대를 만들어낸 것도 바로 카라얀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이를 종합해 볼 때 도덕과 윤리, 사회통념 등은 성공을 향한 질주에 큰 장애물로 작용할 수 없었고 다른 무엇보다도 음악을 통한 자신의 출세에 무게중심을 크게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치에 부역하며 보다 더 유명해졌고 점점 젊은 거장으로 발돋움하고 있던 카라얀. 그러나 그의 앞엔 평생을 두고 넘을 수 없었던 커다란 장벽이 버티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바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Wilhelm Furtwangler). 20세기가 낳은 가장 위대한 지휘자로 칭송받는 바로 그 푸르트벵글러였다. 푸르트벵글러는 당시 나치에게 반강제적으로 협력하며 당대 최고의 지휘자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고 그의 음악을 통해 나치의 선전, 선동정책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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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트벵글러와 카라얀. 현세의 황제와 차세대 황제의 사이는 결코 좋지 않았다. 어쩌면 두 사람은 너무 많이 닮았기에 그토록 서로를 싫어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사실 푸르트벵글러와 카라얀은 라이벌 관계라고 하기엔 당치 않았다. 이렇게 비유하면 어떨까? 푸르트벵글러는 이순재. 카라얀은 이제 막 크고 있는 아역 탤런트. 그러나 나치에 자진입당하여 부역행위를 충실히 한 카라얀에 비해 반강제적으로 나치에 협력했고 괴벨스를 무척이나 싫어하여 악수조차도 꺼렸다는 푸르트벵글러는 나치에게 있어서 껄끄러운 존재임이 분명했다. 이런 관계를 잘 알고 있는 나치는 푸르트벵글러 vs 카라얀이라는 선정적인 대결구도를 만들어 흥미를 유발했다는 점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나치 독일의 패망과 함께 나치의 그늘 밑에서 출세의 발판을 다지고 있던 카라얀에게 첫 번째 시련이 찾아오게 된다. 카라얀은 그의 두 번째 부인과 함께 밀라노에서 가택 연금을 당하게 되었고 일체의 지휘활동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카라얀은 바로 이 시기에 악보를 공부하며 더 좋은 지휘자가 되기 위한 양분으로 삼는다.

악보를 공부한 것뿐만이 아니었다. 카라얀은 음반녹음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EMI의 천재 프로듀서인 월터 레그를 만나게 된다. 이때 카라얀은 월터 레그에게 미녀 소프라노인 엘리자베스 슈바르츠코프를 소개시켜줬고 레그와 슈바르츠코프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일 내용이 있다. 레그는 여성편력으로 소문이 자자한 사람이었고 슈바르츠코프는 지저분한 과거의 행적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거물이 된 것이 남편 잘 만나 팔자 고친 덕이란 비난도 많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레그, 슈바르츠코프, 카라얀의 만남은 향후 어마어마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며 자신들의 분야에서 최고 중의 최고의 자리를 만들어 주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다시 한 번 느끼지만 성공한 사람의 인생을 보면 왜 그 사람이 성공했는지에 대한 답이 나온다. 시련을 끝이라 생각하지 않고 미래를 위한 또 하나의 발판으로 삼는다는 것. 말은 쉽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1948년이 되어서야 그는 해금조치를 통해 다시 지휘자로 복귀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빈에서도 마이너 악단으로 취급받는 빈 오케스트라(빈 필이 아님)를 맡아 세계적인 악단으로 거듭나게 하였다(이들이 만든 그 유명한 음반이 바로 리히터와 협연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이다). 그러나 이때 또 하나의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앞서 언급한 푸르트벵글러때문이었다. 푸르트벵글러는 성공을 위해 최소한의 양심마저도 벗어 던지는 카라얀을 무척 증오했고 무시했다. 그리고 카라얀이 하는 일엔 사사건건 반대하며 그의 앞길을 가로 막았다.

푸르트벵글러의 잇따른 반대에도 불구하고 카라얀은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고 푸르트벵글러의 지휘 모습을 남몰래 훔쳐봤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젊은 지휘자 시절엔 토스카니니에게서, 그 후엔 푸르트벵글러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그는 평생을 두고 푸르트벵글러를 두려워했고 그에 대한 강박관념 또한 대단했다. 그러나 푸르트벵글러 사후 그는 추모 연주회도 열지 않았다. 이 정도면 해도 너무한 멤피스토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도 반론이 가능하다. 우선 푸르트벵글러와 카라얀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푸르트벵글러는 두말할 나위 없이 독일이 자랑하는 최고의 지휘자였고 당대 최고의 실력자였다. 국내 탤런트로 치자면 이순재급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다. 이에 반해 카라얀은 이제 막 커나가는 아역 탤런트 정도에 불과한 잔챙이였다. 그런 푸르트벵글러가 왜 카라얀을 그토록 미워했고 사사건건 방해했을까? 어쩌면 푸르트벵글러는 자신의 젊은 시절과 너무 닮은 카라얀의 모습을 보며 두려움을 느꼈던 것을 아니었을까? 푸르트벵글러 역시 성격이 결코 원만한 것만은 아니었고 시기와 질투가 많은 인물이었다. 그 역시 젊은 시절엔 토스카니니의 대단한 칭찬을 받고서도 답례조차 하지 않았고 자신이 최고라 여기고 이기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푸르트벵글러의 추모공연을 하지 않았던 점도 이해할 수 있다. 세상에 어떤 미친놈이 평생 동안 떡하니 앞을 가로막고 사사건건 방해만 했던 노인네에게 좋은 감정을 갖고 추모공연씩이나 해주겠나? 무골호인이거나 제대로 이중인격자 아니면 못할 일이다. 적어도 카라얀은 그 정도로까지 심한 이중인격자는 아니었고 곤조가 있는 인간이었다.

1954년. 드디어 황제가 운명했다. 푸르트벵글러는 초겨울의 찬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11월 30일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세계 최고의 권좌인 베를린 필에 누가 새로이 즉위를 할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로 대두되었다.

후보는 세 명으로 압축되었다. 이탈리아 출신의 젊은 거성 귀도 칸텔리. 그리고 푸르트벵글러가 총애했고 복권되기 전 베를린 필을 훌륭하게 이끌었던 세르쥬 첼리비다케. 그리고 카라얀이었다. 카라얀의 가능성은 높게 보이지 않았으나 칸텔리는 비행기 사고로 35세의 나이에 아깝게 비명횡사했고 첼리비다케는 그의 모난 성격과 단원들과의 불화, 협소한 레퍼토리 때문에 쫓겨났고 이에 하늘의 운빨이 뻗친 카라얀이 새로운 황제에 등극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카라얀의 인생은 거칠 것 없는 성공가도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 얼굴의 마에스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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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얀과 음반제작의 귀재인 발터 레그. 두 사람의 만남은 20세기 중반 이후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자신만의 확고한 제국을 구축하게 하였다. 물론 처음에는 좋은 공생관계였으나 훗날엔 착취의 관계로 변질되었지만 말이다.

푸르트벵글러와 토스카니니의 시대가 저문 후 그들의 뒤를 이을 차세대 주자 중 가장 각광받는 존재로 부상하게 된 카라얀. 이제 그의 성공가도엔 거칠 것이 없었다. 1959년부터 베를린 필과 종신계약을 맺은 카라얀이 DG와 본격적으로 녹음을 시작했다. 1964년부터 그의 고향인 잘츠부르크로 돌아가 잘츠부르크 음악제를 만들어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이 음악제는 그 자신의 명성과 업적을 더더욱 공고히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고 이는 카라얀이 처음부터 의도했던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그는 이 음악제의 음악과 연출을 총감독했으며 이 음악제의 성공을 위해 열심히 레코딩과 공연을 하여 많은 돈을 벌어 들였다. 

카라얀은 동시대를 살았던 그 어떤 지휘자보다도 레코딩과 영상물의 기록에 열과 성을 기울였던 지휘자였다. 생소하기만 한 영상물의 촬영에 심혈을 기울여 전속 이발사까지 두고 조명의 각도, 카메라의 위치 등을 무척 꼼꼼하게 챙기고 지휘했다. 그의 동영상을 보면 팀파니가 두들기는 장면에서 미세하게 퍼지는 먼지의 움직임까지도 멋들어지게 보일만큼 영상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공기의 미세한 움직임, 극미세(極微細)의 파동마저도 그의 음반과 영상물에 담아낼만큼 그는 대단히 치밀하고 완벽한 성격의 소유자였고 대중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선 또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그대로 활용했던 천재적인 인물이었다.
 
카라얀은 완벽함을 추앙하는 성격의 소유자였고 그 완벽함은 다른 사람, 특히 오케스트라의 단원과 오페라의 가수들에게 있어서 관대하지 못한 성격으로 이어졌다. 카라얀은 오케스트라의 단원들과 대단히 인간적인 유대관계를 강조하며 실천했으나 그 유대관계는 개개인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하나의 유기물로 생각하는 절대복종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그에겐 반대를 위한 언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오페라 가수와 크게 싸운 적도 있었고 20년이 넘도록 그와 함께 수족처럼 움직였던 베를린 필과의 파국까지로 이어졌다.

카라얀의 일화를 통해 그의 성격을 종합해보면 지나치게 자존심이 강했고 그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무수한 노력을 마다하지 않았던 집념 또한 대단히 강한 사람이었다. 성공을 위해선 작은 도덕적 결함 따윈 필요악이라 생각했고 강자에겐 약하게 굽힐 줄 알았으나 약자로 생각되는 자들에겐 군림하고자 하는 독재적인 면이 강했다. 어릴 적부터 친구를 사귀기 힘든 성격이었다고 스스로 토로할 만큼 사람을 사귀는 재주는 뛰어나지 않았고 대인관계에 있어선 대단히 내성적인 면이 있었다.

또한 될 성 싶은 떡잎들은 철저히 보호, 후원해주며 발탁하는 과감하고 따스한 면도 있었다. 카라얀에게 발탁되어 그와 함께 협주곡을 연주하며 빛을 보게 된 연주자들이 있다. 바이올린의 크리스티앙 페라스, 안네 소피 무터, 그리고 피아노의 알렉시스 바이젠베르크, 에브게니 키신, 성악가 조수미 등이 그들이다. 이들이 카라얀의 큰 도움을 받고 세계적인 거장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카라얀은 이들을 발굴, 육성하는 것이 자신에게도 큰 부와 명예를 가져다 줄 윈윈의 전략임을 충분히 고려한 것이었다.

Posted by sni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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