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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특히 바그너의 오페라를 좋아하는 팬들이라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명지휘자의 이름이 있다. 바로 헝가리 출신의 영국 지휘자인 게오르그 솔티(Georg Solti)이다. 카라얀의 장기집권이 이어지던 20세기 중후반의 클래식 음악계에서 보기 드물게 카라얀, 번스타인 등과 함께 자신만의 위치를 확고히 하며 전 세계에 이름을 떨친 바로 그 사람. 헝가리 출신의 지휘자로 영국 황실에서 기사의 작위를 받으며 승승장구했고 훗날 미쿡으로 건너가 시카고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던 인물. 게오르그 솔티라는 이름보다는 ‘Sir Georg Solti’, 게오르트 솔티 경이라는 영광스런 호칭이 어쩌면 더 잘어울리는 인물, 심장을 고동치게 하는 강렬한 비트로 이른바 근육질의 지휘자라고도 불렸던 게오르그 솔티에 대해 알아본다.

나의 꿈은 지휘자

솔티는 1912년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유태인으로 태어났다. 원래 그의 이름은 Georg Solti가 아닌 György Stern이지만 유태인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 그의 아버지가 개명을 하였다. 리스트 음악원에 입학하여 헝가리를 대표하는 음악가들인 바르톡, 코다이, 도흐나니 등에게서 작곡과 피아노를 익히며 처음엔 피아니스트로 데뷔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그가 지휘자가 되기로 맘먹은 것은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아버지이기도 한 에리히 클라이버가 지휘하는 강렬한 모습을 처음으로 접하고 바로 지휘자가 되기로 마음을 굳히게 되었다. 그리고 부다페스트 오페라극장의 부지휘자로 활동하기 시작, 1938년에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지휘하며 본격적으로 데뷔하게 된다. 그리고 이 능력있는 젊은 지휘자의 앞날엔 환한 미래가 열릴 것으로 생각하였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이제부터 젊은 솔티의 파란만장한 인생의 서막이 열리게 된다. 아직은 꿈과 희망에 벅찬 젊은 지휘자 솔티가 데뷔한 날은 3월 11일이었다. 그리고 그 날은 히틀러와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날이 되겠고 이제 히틀러와 나치의 세력은 전 유럽에 걸쳐 맹위를 떨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솔티는 유태인, 그것도 개종을 하지 않은 유태인이었던 것이다.

성공적인 지휘자 데뷔를 하게 된 그 다음해, 나치의 전 유럽에 대한 침공이 본격화되었고 이에 솔티는 스위스로 피신하게 된다. 스위스에서 그는 피아니스트로 잠깐 활동하며 1942년에 열린 제네바 콩쿨에서 우승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2차대전이 끝난 후 그는 다시 지휘자로 데뷔, 바이에른 국립오페라극장과 푸랑크푸르트 오페라 극장의 음악감독을 역임하며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럽 각지에서 객원지휘를 맡으며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의 명성은 1950년대에 쭉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여기까진 그의 본격적인 성공을 알리는 예고편에 불과했다. 그의 진정한 성공시대는 1960년대, 영국으로 건너가면서부터이다.

영국에서, 미국에서-소리치는 해골의 거침없이 하이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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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Screaming Skull'의 포스터. 단원들은 솔티의 모습을 이같은 비유하여 별명을 붙였다.


솔티는 1950년대 이후 20세기의 중, 후반에 활약했던 수많은 지휘자들 중에서 카라얀, 번스타인 등과 함께 대중적인 인기를 가장 많이 얻은 인물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물론 칼 뵘, 카를로스 클라이버, 그리고 헝가리 출신의 선배 지휘자들인 프리츠 라이너, 조지 셀, 유진 오먼디 등 훌륭한 지휘자들이 많이 있지만 ‘대중적인 인기’라는 측면에서 보면 솔티의 인기를 능가할 수 없었다. 이는 즉, 솔티가 대중적 인기를 얻기 힘든 클래식 음악이라는 팬층이 국한된 장르에서 활동하면서 대중적 인지도, 인기를 얻기 위한 여러가지 다양한 활동을 했다는 뜻도 포함된다. 여기에서 그의 대중적 인기와 업적을 알 수 있는 사례를 몇 가지만 들어본다.

-그래미상 최다 수상기록. 솔티는 미국에서 최고의 음반으로 평가 받는 음반을 남긴 아티스트에게 수여하는 그래미상을 무려 20년간 31회에 걸쳐 수상하였다. 이는 기네스북에 등재된 기록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후보에 오른 것만도 모두 74회나 된다.
-게리 올드먼이 주연을 맡은 베토벤의 생애를 주제로 한 영화 ‘불멸의 연인’이 있다. 참고로 이 영화는 내 인생의 음악영화 중 최고의 영화라고 손꼽는 명작인데 이 영화의 음악감독을 바로 솔티가 했다.
-솔티는 미국내에서 활동하는 유태인 음악가들의 대부격인 인물이었다.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야사 하이페츠, 아이작 스턴, 레너드 번스타인, 핀커스 주커만, 이착 펄만으로 이어지는 이 유태인 음악가들의 계보에서 솔티는 중추적인 역할을 했고 젊은 유태인 음악가들이 성장하는데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유태인뿐만 아니라 젊은 음악가들의 성장에도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젊은 음악가들이 솔티와 함께 공연한 것만으로도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성악가 조수미가 짤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솔티와 함께 ‘마술피리’를 공연한 이후 세계적인 스타로 거듭난 것은 너무도 유명한 일화이다. 또한 정경화와 함께 녹음한 바이올린 협주곡들은 명반으로 기억된다.
-세계적인 만년필 회사인 몽블랑에선 세계적인 음악가들을 기념하기 위한 테마상품으로 음악가들의 실명을 본뜬 상품을 만들고 있다. 카라얀 만년필도 있는데 2006년부터 솔티 만년필도 출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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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티의 이름을 본뜬 만년필.


더 있지만 일단 여기까지만. 이만큼 솔티는 가장 영향력이 큰 지휘자 중 한 사람이었고 많은 이들에게 존경받는 훌륭한 지휘자였다.

솔티는 2차대전 후인 1950년대부터 유럽 각지에서 조금씩 명성을 쌓아갔고 1961엔 영국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본격적인 성공신화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영국의 코벤트 가든 왕립 가극장의 음악감독으로 10년간 재직하며 유명무실했던 이 오케스트라를 다시금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영국황실은 그에게 기사의 작위를 수여한다.

첫번째 성공신화가 영국에서 이뤄졌다면 두번째는 미국에서였다. 솔티는 1969년부터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CSO)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한 후 무려 20년간 장기집권하며 CSO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였다. CSO는 솔티의 고향 선배인 프리츠 라이너가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로 발돋움하게 한데 이어 이번엔 솔티가 맡아 20년간 맡게 된 것이다. 솔티의 생애 최고의 영광된 시간들은 바로 이 기간에 이루어진 것들이다. 수많은 레코딩 활동을 통해 음반을 남겼고 그가 사망하기 전까지 무려 999회라는 믿기지 않을 만큼 많은 공연을 하였다.

그러나 솔티와 CSO가 꼭 밀월관계만은 분명 아니었다. 20년의 장기집권의 마지막은 그닥 좋은 모양새는 아니었다. 단원들과의 보이지 않는 알력다툼이 심했고 말년엔 단원들의 퇴진 요구가 거셌다. 결국 명예지휘자라는 허울좋은 타이틀을 받으며 물러나긴 했지만서도 까놓고 이야기하면 단원들에게 밀려난 것이다. 그와 동시대에 활약한 라이벌 지휘자 카라얀이 베를린 필에서 바로 그랬던 것처럼.

또한 솔티는 단원들에게 무시무시한 카리스마로 군림했던 지휘자들 중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기도 했다. 엄격한 리허설과 수많은 연습을 통해 단원들의 기량을 끌어올리는데 집중했다. 흔히 하는 이야기들이 ‘연습은 실전처럼 실전은 연습처럼’이라고 하지만 정작 이를 실천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하지만 솔티는 이를 그대로 실행에 옮겼던 스타일이었다. 연습할 땐 너무도 엄격한 분위기 속에서 단원들의 눈물을 쏙 빼놓았지만 정작 실제 연주회에선 음악과 연주 자체를 즐기는 스타일로 단원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준 양면의 카리스마가 있었다.

솔티에겐 유명한 별명도 하나 있었다. 코벤트 가든 코벤트 가든 왕립 가극장시절 단원들은 리허설하는 그의 모습을 두고 소리치는 해골(Screaming Skull)이란 별명을 붙여줬다. 솔티 본인이 듣기엔 결코 유쾌할 수 없는 별명이겠지만 어디 별명이란 것이 본인에게 기분 좋으라고 붙여주는 게 있었던가?

999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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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의 Sir Georg Solti Garden 앞에 위치한 솔티의 조형물. 이 냥반. 살아서도 그렇게 온갖 영광 다 누리고 가더니 저 세상 가서도 이렇게 호강이다.


무려 20년의 세월 동안 CSO를 맡으며 세계적인 명성의 악단으로 발돋움하도록 만든 솔티.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는 이 CSO와 함께 999회라는 믿을 수 없는 많은 횟수의 공연을 하였다. 그리고 1000번째 공연은 1997년 10월, 그의 생일을 기념하는 축하의 자리로 마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000번째 공연의 주인공은 솔티의 몫이 아니라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많은 음악가들과 팬들의 가슴속에 평생 묻어두어야 할 몫으로 남게 되었다. 연주여행 스케쥴로 인해 방문한 프랑스의 앙띠베에서 그는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사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공식적으로 은퇴를 한 것도 아니었고 건강이 썩 좋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그가 사망한 날의 그 다음주에도 런던에서 베르디의 ‘레퀴엠’ 공연 스케줄이 잡혀 있을 만큼 그는 말년에까지도 왕성한 정력, 끊임없는 에너지를 선보였다.

하지만 인명은 재천이라고 했던가. 살아생전 누릴 수 있는 영광의 자리는 모두 누렸던 지휘자. 헝가리에서 유태인으로 태어나 2차대전의 포화를 피해 스위스로 망명을 했고 가족간의 이별이라는 아픔을 겪어야 했던 음악인. 그러나 고국인 헝가리가 아닌 타국에서 명성을 얻고 영국의 황실에서 기사의 작위까지 수여받았던 대 지휘자 게오르그 솔티 역시 하늘의 부름을 받고 이처럼 갑작스레 사망하였던 것이다.

성대한 장례식 후, 솔티는 그의 스승이었던 벨라 바르톡의 곁에 묻혀 영원한 안식을 얻게 되었다. 그가 사망한 후에도 그의 가족들은 솔티 재단을 설립하여 젊은 음악가들의 후원을 위해 많은 사업을 하고 있다. 또한 푸랑크푸르트에선 한때 솔티가 푸랑크푸르트 오페라 극장의 음악감독을 역임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솔티 지휘자 콩쿨을 창설하였다.
Posted by sni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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