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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우연찮게 ‘소녀와 가로등’이라는 옛 명곡을 유튜브를 통해 보고 듣게 되었다. 평소엔 관심도 없었기에 그저 알고 지내는 많은 노래들 중 하나였으나 이 오래된 흑백 영상속에서 심금을 울리는 목소리의 가수와 이토록 애절한 가사의 내용이 궁금하여 댓글을 읽으며 나는 세 가지의 놀라운 정보를 알게 되었다. 


첫째, 이 노래를 그 유명했던 싱어송 라이터인 장덕이 작사, 작곡했다는 것이다. 장덕은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능력있는 가수이자 작곡가였음은 분명하나 이토록 애절한 가사와 멜로디의 곡을 쓰는 줄은 알지 못했다. 
둘째, 장덕이 이 곡을 고교생 때 작곡했다는 것이다. 첫번째 이유와 마찬가지로 장덕이 음악인과 팬들 사이에서 유명한 싱어송 라이터임은 알고 있었으나 고등학생 때 이 곡을 작사, 작곡하였고 대회에 출전하여 지휘까지 하는 능력을 갖추었음은 처음 알게 되었다. 
셋째, 이 노래를 부른 사람이 진미령이라는 사실이었다. 내가 아는 진미령은 가수로 활동했고 지금도 역시 간간히 무대에 나와 노래를 부르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전유성과 결혼 이후엔 전유성의 아내, 예능 프로그램의 패널 정도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랬던 진미령이 이토록 아름다운 노래를 이토록 가슴이 미어지도록 애달프게 불렀던 가수였음은 처음 알게 되었기 때문에 적잖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링크된 유튜브 영상의 댓글과 함께 웹서핑을 통해 알게 된 또 다른 정보들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이 곡을 부르고 있는 가수가 바로 신인가수 진미령이고 뒤에 보이는 악단을 지휘하고 있는 빵모자를 쓴 소녀가 바로 작사와 작곡을 한 장덕이다. 장덕은 이 곡을 중학교 2학년 때 작곡했고 그 유명한 송창식이 1977년에 열릴 서울 국제 가요제에 출품할 것은 권유하였다. 그리고 이 영상에서 보고 있는 무대는 1977년 제1회 서울가요제이며 장덕이 이 곡을 진미령에게 선물하여 함께 무대에 서게 된다. 
내가 이 영상을 넋놓고 몇 번씩이나 보게 된 이유는 원래 알고 있던 서글픈 멜로디와 진미령의 심금을 울리는 목소리뿐만이 아니다. 영상의 좌측에 표시되는 가사가 너무도 애절하고 슬펐기 때문이었다. 

 

조용한 밤이었어요. 너무나 조용했어요. 
창가에 소녀 혼자서 외로이 서있었지요. 
밤하늘 바라보았죠. 별 하나 없는 하늘을
그리곤 울어버렸죠. 아무도 모르게요. 
창밖에 가로등불은 내 맘을 알고 있을까
괜시리 슬퍼지는 이 밤에 창백한 가로등만이
소녀를 달래주네요. 조용한 이 밤에
슬픔에 지친 소녀를 살며시 달래주네요. 

 

앞서 언급했듯이 장덕은 이 곡을 중학교 2학년 때 작사, 작곡했다는데 이토록 애절한 가사를 쓴 사연이 있었다. 장덕의 부모는 어릴 적 이혼을 했고 그 후 부모는 남매를 한 명씩 나누어서 키웠다. 부모는 자식들의 왕래를 허용하여 남매는 정기적으로 각자의 부모의 집에 가서 시간을 보내며 남매끼리도 재회할 수 있었다. 늦은 밤이 되어 자고 가라는 장덕의 부탁을 오빠 장현은 아쉬움 속에 거절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오빠와 헤어진 가로등 아래서의 쓸쓸한 마음을 가사로 표현한 것이었다.  

 

이 노래의 가사까지 알고 나서 다시 몇 번씩이나 가사의 의미를 되새기며 노래를 듣다보니 이 가사는 아무리 감수성이 유별난들 중학교 2학년생의 머릿속에서 나올 수 있는 가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이 가사의 내용이 너무 슬퍼서 이제 겨우 10여년 살아온 어린 소녀의 머리와 가슴에서 나와선 안될 가사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노래를 부르는 진미령 역시 슬픈 가사의 이야기에 동화된 걸까? 흑백의 조악한 화면으로 봐도 금방 알 수 있을만큼 양볼에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노래를 이어가고 있다.

 

이 장면은 1절을 마치고 2절이 시작되기 전 간주 시간의 모습인데 양볼에 눈물이 흘러내렸음을 알 수 있다.

 

이 장면은 모든 노래를 마친 후의 모습이다. 오른손을 들어 얼굴에 흘러내린 눈물을 닦고 있다.

 

노래를 부르는 진미령은 북받치는 감정에 겨워 눈물을 흘릴 때 이 애절한 곡을 만든 장덕은 차분한 표정으로 악단을 지휘하고 있다.

 

모든 것을 다 이루는 듯, 하지만 너무 일찍 저버린 꽃


그렇다면 이토록 슬픈 가사의 명곡을 선보인 이후의 장덕은 어떤 삻을 살았을까? 이 다음해에 열린 제2회 서울 국제가요제에 오빠 장현이 부른 노래의 작곡가로 출전, 입상하였고 그 다음해에 열린 제3회 대회에서마저 출전, 입상하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고교생 장덕의 성공가도는 음악 분야에서만 그치진 않았다. 오빠나 동생 모두 출중한 외모를 타고난 덕에 영화배우로도 캐스팅되어 여러 청춘영화에서 주조연으로 연기하며 최고의 스타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듯 보였다. 하지만 정작 장덕 본인은 스타로서의 요란한 주목을 받는 삶을 원치 않았던 것 같다. 1980년 모친이 거주하는 미국으로 훌쩍 떠나버린 후 그 유명한 테네시주에 있는 내슈빌의 벨몬트 칼리지 음악과에 입학하여 제대로 된 음악수업을 받게 된다. 또 한편으로는 사랑에 빠져 1981년 10얼에 불과 21세의 나이에 결혼도 하였고 미국내에서 한인들을 위한 방송에 출연하여 연예인 생활을 이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2년에 불과했고 1983년 10월에 이혼 후 다시 한국으로 귀국하여 음악인으로 재기를 도모했다. 하지만 1984년까지 대중의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이때 장덕은 식음을 전폐했다고 할 정도로 크게 상심하였고 오빠 장현이 다시 남매 듀엣을 결성해보자는 제안을 수락, 1985년에 다시 재기에 성공한다. 이때 발표한 곡들이 바로 지금까지의 장덕뿐 아니라 장현을 기억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곡인 ‘너나 좋아해 나너 좋아해’를 비롯한 명곡들이었다. 


오빠와의 듀엣으로 성공하며 재기의 발판을 다진 장덕은 이듬해인 1986년부터 매년 새로운 곡들을 발표하며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다. 나 역시 바로 이때의 장덕을 기억하는데 순수하고 커다란 눈망울, 예쁜 보조개를 가진 너무도 예쁜 소녀 같은 모습의 가수가 열창하는 무대였다. 

 

하지만 누가 알았을까? 그토록 약 3년여의 시간이 그녀의 삶에 주어진 마지막 시간이었고 그 마지막을 후회없이 살기 위해 그토록 화려하게 불태웠다는 것을. 
장덕의 인생에서 큰 충격과 아픔을 안긴 첫번째 사건이 부모의 이혼으로 인한 가족의 해체였다면 또 한번의 결정적인 사건이 바로 그녀가 가수로서 재기하여 가장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던 시기에 터졌기에 더욱 안타깝고 가슴 아프다. 그건 바로 어릴적부터 마치 한몸처럼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온 오빠가 혀에 암이 걸려 길어야 몇 년 밖에 살지 못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때 장덕은 연예인 활동을 중단하고 오로지 오빠의 병간호만을 위해 힘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병간호 기간동안 불면증에 시달려 수면제를 복용하고나서야 겨우 잠자리에 드는 등 그녀의 몸과 마음은 점점 더 황폐해져만 갔고 결국 1990년 2월에 그토록 애달픈 오빠의 간호에 집중하던 그녀는 오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사인은 수면제, 감기약, 기관지 확장제의 약을 복용한 후에 생긴 약물 쇼크였다. 


앞서 언급한 장덕에게 생긴 충격과 아픔의 두 가지 사건-부모의 이혼, 오빠의 시한부 판정-들을 가만히 보면 장덕 본인의 사고와 행동이 개입된 인과관계가 전혀 성립되지 않는, 그저 가족들의 불화와 불가항력적인 아픔에 이유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럴수록 어지간히 강한 의지를 갖지 못하는 사람은 대체로 무너져버리기 마련인데 적어도 장덕은 사망 직전 까지도 다른 여러 가수들의 작곡의뢰를 받아 작곡에도 집중했다는 점으로 볼 때 오빠와 동료 가수들을 향한 책임감때문에라도 끝까지 삶의 의지를 붙잡고 있었으나 그녀가 받아들여야 했던 가혹한 운명이 너무도 크고 벅찼기에 28세의 젊다 못해 너무 어린 나이의 그녀가 세상과 이별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당시 언론에서는 남매가 함께 노래하고 그 중 여동생이 먼저 세상을 떠난 사실이 미국의 인기 듀오인 ‘카펜터즈’와 비슷하다며 이들을 한국의 카펜터즈라 불렀는데 내 생각엔 한국의 멘델스존 남매라 부르는 게 더 합당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우선 카펜터즈에서 여동생 카렌은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오빠 리처드는 80이 다 된 나이까지 장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멘델스존 남매는 누나 파니가 42세의 짧은 생을 마치고 사망한 후 큰 충격과 슬픔에 빠진 동생 펠릭스가 불과 6개월 후 38세의 더욱 짧은 생을 마치고 누나의 뒤를 따른다. 

 


가정환경 또한 비슷하다. 멘델스존의 가정은 유대인 가문 중 최고 중의 최고의 집안이며 그의 할아버지는 유태교의 랍비였고 아버지는 은행장이었다. 모든 것을 다 갖춘 것을 훨씬 넘어, 넘쳐 흐를 정도로 많은 것을 갖춘 집안이었다. 장덕의 가정 또한 아버지가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첼리스트, 어머니는 서양화가로 1960년대 초반의 한국사회에서는 최상류층 인텔리 집안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Posted by sni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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