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 타이거즈의 V12-두 가지 기시감이 들었던 한국시리즈. 그리고 타이거즈의 미래
7년만에 한반도를 뒤덮는 호랑이의 물결! 37년만에 내 고향에서 느끼는 영광의 숨결! 그리고 12번째 맞이하는 완전무결한 승리공식! 우리는 한국시리즈 불패신화와 작별하지 않는다!
I. 승률 100%로 이룬 V12라는 압도적인 성과
2024년 한국프로야구의 성적과 흥행을 함께 선도하며 완벽하게 압도했던 기아 타이거즈는 결국 한국시리즈 우승, V12라는 당연한 귀결로 시즌을 마쳤다.
V12.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엔 얼마나 대단한지 감조차 오지 않을 이 기록이 어떤 기록인지 그냥 수박 겉핧기 식으로만 이야기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1. 미국 메이저리그 (MLB)에서 월드시리즈의 역사가 121년이다. 121년의 긴 역사 중 최다 우승팀이 그 유명한 뉴욕 양키스인데 이들이 27회 우승을 기록했다. 그리고 그 뒤를 잇는 팀이 또 하나의 영원한 명문팀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인데 이들이 11회, 그리고 그 뒤를 잇는 팀들이 또 하나의 유명한 팀인 보스턴 레드삭스와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인데 이들이 9회씩을 기록했다. 100년이 훌쩍 넘는 역사속에서도 10번의 우승을 채운다는 게 얼마나, 정말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MLB의 30개 구단 중 양키스를 제외한 29개 구단이 설명해 주고 있다.
2. 그렇다면 일본 프로야구에서의 역사로 눈을 돌려보면 어떨까? 1950년부터 개최된 일본 시리즈에서 그 유명한 요미우리 자이언츠, 일명 쿄진군(巨人群)이 22회, 1980년대 최강팀이었던 세이부 라이온즈가 13회, 21세기 최강팀은 소프트뱅크 호크스가 11회를 기록하고 있다. 이에 반해 해태-기아 타이거즈는 43년 한국프로야구 역사에서 무려 12번의 우승을, 그것도 20세기의 19년간 9번을 차지했으니 그 당시 한국프로야구 개막 전 전문가들의 전망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올해에도 타이거즈가?’ 혹은 ‘올해야말로 타이거즈를?’ 이라고 표현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3. V12는 1, 2번의 미국, 일본 프로야구의 명문팀과의 우승 횟수 비교로도 놀라울 일이지만 그보다 훨씬 놀랄 일은 따로 있다. V12까지 거쳐온 과정이다. 타이거즈는 무려 12번의 우승을 차지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준우승을 차지하며 상대팀의 헹가래를 보며 울분을 삭히는 박수를 보낸 적이 없다. 그들은 언제나 시즌 최후의 날에 최후의 승자였고 그들이 끝내야 승부를 끝낼 수 있을 뿐이었다. 앞서 언급한 MLB의 양키스와 일본의 자이언츠를 비교해보면? 양키스는 27회 우승과 14회 준우승, 자이언츠는 22회 우승과 14회 준우승을 기록했으니 승률은 각각 66%, 61%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 지나지 않는 게 아니라 이들을 제외한 다른 구단들이 보기엔 66%, 61%라는 엄청난 승률을 기록한 것이다. 그렇다면 타이거즈가 기록한 준우승 없는 승률 100%의 V12가 얼마나 말도 안되는 성과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II. 2024년 한국시리즈 시작 전에 느꼈던 두 번의 기시감(旣視感)
2024년 한국시리즈는 정규시즌 말과 포스트시즌이 시작할 때부터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흥분감을 주었다. 타이거즈가 한국시리즈에 직행한 후 과연 어느 팀이 시리즈의 파트너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인지를 보는 재미와 함께 어느 팀이 올라가도 오랜만에 아주 재미있는 시리즈를 보게 될 것이라는 기대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대결이 성사되기 전부터 나에게는 이번 시리즈에서 두 가지의 기시감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1993년 V7의 한국시리즈 7차전 하이라이트이다. 이종범은 시리즈 내내 맹활약했지만 그냥 이 7차전만으로도 왜 이종범이어야만 하는가의 물음에 답해준다.
첫번째 기시감은 기아 타이거즈의 상대가 누가 될 것인지 결정되기 전에 생겼다. 왠지 모르게 1993 시즌과 똑같은 판도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 꽤 흥미롭게 느껴졌다. 1993년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4팀의 정규시즌에서의 최종순위는 1. 해태(기아) 2. 삼성 3. LG 4. OB(두산)이었고 이는 31년 후인 2024년에 5위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KT의 부재 외엔 순위까지 똑같다. 나는 옛날과 순위까지 똑같은 결과를 보며 31년이라는 오랜만에 기아 타이거즈와 삼성 라이온즈가 다시 한국시리즈에 붙을 수 있다면 어떤 이유로든간에 한동안 야구를 외면했던 올드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최고의 조합이라고 생각하여 이 둘의 대결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나의 예상과 바람대로 전통의 명가인 기아 타이거즈와 삼성 라이온즈의 빅 오브 빅 매치가 오랜만에 이루어졌다. 이 두 팀을 전통의 명가이자 둘간의 대결을 빅 오브 빅 매치라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명백하다. 이 두 팀이야말로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많이 우승함과 동시에 한 번도 준우승을 해본 적이 없는 팀과 가장 많이 한국시리즈에 진출함과 동시에 가장 많이 준우승을 경험한 팀끼리의 대결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기시감은 해태 왕조의 마지막 한국시리즈 MVP인 이종범이 유튜브 ‘스토킹’에 출연하여 1997년 한국시리즈의 추억을 이야기한 것을 들었을 때가 떠올려졌다. 이종범은 당시 분위기는 해태가 압도적이었고 당시 신인왕이었던 LG의 이병규는 이종범에게 ‘저희는 그때 게임이 안될 거라 생각했어요’ 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만큼 2024년의 기아 타이거즈는 정규시즌 내내 압도적이었고 특히 2위로 오른 팀이 일명 ‘호랑이 꼬리잡기’를 시도했다간 얼마나 무자비하게 처맞을 수 있는지 여러 차례에 걸쳐 보여주었다.
이 두가지 기시감을 종합해보면 한국시리즈의 결과는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었다. 두말할 나위 없는 기아 타이거즈의 우승이며 그것도 스윕 아니면 4승 1패라고. 1993년 한국시리즈는 한국시리즈 사상 최고의 명승부 중 하나로 이제껏 회자되는데 해태 타이거즈가 9번 우승하는 동안 유일하게 7차전까지 치렀을뿐더러 4차전까지 1승 1무 2패로 밀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시 삼성은 해태를 상대로 정규시즌에서 우위를 거둔 유일한 팀이었던 반면 2024년 올해의 삼성은 정규시즌에서 기아 타이거즈를 상대로 4승 12패라는 절대 열세였으므로 1993년과 같은 결과는 나오지 않을 것이라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었다.
III. 21세기에 다시 세울 왕조의 기틀
이번 한국시리즈를 본 후에 매우 감동하며 보았던 합성사진 한 장. 바로 마무리 투수 정해영과 포수출신 아버지 정회열과의 합성사진이다.
2024년에 이루어 낸 기아 타이거즈의 V12는 타이거즈가 해태에서 기아로 바뀐 이후 이루어 낸 V10, V11과는 또 다른 흐름속에서의 성과라는 점에서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2009년과 2017년에 이룬 두 번의 우승은 21세기에 왕조 건설에 성공한 두 팀인 SK, 두산이 최전성기이자 한창 왕조를 건설하고 있던 시절에 이룬 것이었다. 즉, 두 팀의 최전성기 시절에 뜬금없이 기아 타이거즈가 정규시즌 우승을 하더니 또 뜬금없이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차지한 꼴이었다. 왕조의 건설은 팀의 분위기를 이끌고 가는 강력한 흐름이 있어야 가능한데 기아 타이거즈의 우승은 그 흐름을 끊는 성과를 거두었을 뿐 그 이상의 성과인 왕조를 구축하는 데까진 부족했다.
기아 타이거즈의 가장 빛나는 현재이자 미래. 눈빛에 바르는 일명 아이블랙의 모습이 다른 선수들에겐 그저 검은 테이프처럼 보이지만 김도영에겐 유독 호랑이 줄무늬처럼 보이는 건 나만의 착시일까?
하지만 이번 V12는 V10, V11과는 다른 점이 보인다. 우선 주전 선수들이 매우 젊어진 점을 꼽을 수 있다. 올해 최고의 돌풍의 일으킨 3루수 김도영을 필두로 하여 박찬호, 변우혁 등 야수들과 곽도규, 최지민, 전상현 등 투수들도 20대 쌩쌩한 선수들이 주축으로 성장하여 우승을 경험했다. 경험이 부족한 젊은 선수를 과감하게 기용하여 팀의 분위기를 바꾸고 고참 선수들에게 긴장감을 주는 건 옳은 선택이다. 하지만 성적을 내기엔 위험한 선택이다. 하지만 그 위험을 넘어 좋은 성적을 내고 심지어 우승까지 차지하게 되면 이 젊은 선수들에겐 다른 또래의 선수들이 갖지 못한 자신감을 갖게 되고 무서울 것이 없어진다. 이에 해당하는 좋은 사례가 되는 팀이 바로 1992년 롯데와 1994년 LG였다. 당시 롯데는 투수에서 고졸신인 염종석, 대졸 신인 윤형배를, 야수는 2년차 대졸인 박정태와 전준호, 2년차 고졸 김민재 등을 과감하게 기용하며 당대 최강이자 전년도 우승팀이었던 해태, 그리고 정규리그 1위팀인 빙그레까지 꺾고 우승하는 기적을 선보였다. 1994년 LG는 지금도 회자되는 대졸 신인야수 3인방, 유지현, 김재현, 서용빈을 내세워 그라운드를 누볐고 함께 투수는 대졸 2년차 이상훈은 팀의 1선발로 활약하며 해태의 조계현과 함께 공동다승왕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처럼 위험한 조건에서도 우승이라는 어려운 위업을 달성해내니 이후 롯데는 3년 후인 1995년, 그리고 그로부터 다시 4년 후인 1999년에 다시 한 번 한국시리즈에 진출했고 LG는 1997, 1998년에 2년 연속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아마도 기아 타이거즈 역시 V12를 통해 큰 자신감을 얻은 젊은 선수들이 몇 년간 계속 한국시리즈에 진출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예상과 기대감을 갖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