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2. 그가 남긴 음악
Artist Story/Pianist / 2007. 11. 19. 17:08
이 글은 본인이 2007년 8월 6일에 인터뷰365라는 매체에 기고했던 글임. 각종 웹사이트에 퍼진 똑같은 내용의 글은 인터뷰365를 통해 여기저기 퍼진 것임.
말년의 리히터. 멋들어지게 담배를 피워 물고 있다. 담배를 들고 있는 손이 엄청나게 큰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손은 굉장히 커서 12도 음을 한 번에 내리칠 수 있을 정도였다.
리히터의 음악훌륭한 연주자, 지휘자를 선정하는 기준을
1. 곡의 완벽한 해석
2. 대중적 흡입력
3. 레퍼토리의 다양성
2. 대중적 흡입력
3. 레퍼토리의 다양성
이상의 세 가지로 봤을 때 20세기를 살았던 그 어떠한 피아니스트도 리히터만큼 완벽한 삼위일체를 이룬 사람은 없다. 아니, 피아니스트를 넘어 그 어떤 연주자나 지휘자를 통틀어도 리히터만큼의 업적을 쌓은 이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가 리히터에 필적할 만큼의 다양한 레코딩을 하였으나 그의 연주는 대중적으로 호불호가 많이 엇갈린다. 지휘자 중엔 카라얀이 또 필적할 만 하지만 카라얀은 그가 다루었던 다양한 레퍼토리 중에서 좋지 않은 연주를 남긴 것도 사실이다.
우선 리히터는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방대한 레퍼토리를 자랑했다. 바흐의 평균율부터 시작하여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의 고전주의를 넘어 슈베르트, 쇼팽, 리스트, 슈만, 브람스,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를 거쳐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라벨, 스크리아빈 등 현대 작곡가의 곡까지 어느 것 하나 할 것 없이 모두 완벽 그 자체의 연주를 구사했다.
또한 어느 한 작곡가의 곡을 잘 연주하는 사람은 다른 작곡가의 곡을 연주할 때에도 그 스타일대로 얽매이는 경우가 많은데 리히터는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너무도 완벽한 변신을 하였다. 리히터의 스승이었던 네이가우스는 이런 리히터를 두고 ‘다른 작곡가의 곡을 연주할 땐 다른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것 같다’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이 역시 어린 시절 독학으로 피아노를 깨우치며 하나의 틀에 얽매이는 교육과정을 거치지 않고 자유롭고 유연한 사고를 가질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리히터의 놀라운 변신은 방대한 레퍼토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독주곡, 협주곡에선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강한 피아노 소리를 냈지만 실내악 반주에선 또 그에 알맞게 다른 연주자를 최대한 서포트하는 이상적인 연주를 하였다. 피아노 소리가 너무 돋보이면 반주로 적당하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리히터는 이 부분마저도 완벽하게 자신을 변신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런 능력을 갖춘 연주자는 20세기를 통틀어 전무하다고 봐도 좋을 정도이다.
또한 그는 피아노를 가리지 않았다. 피아니스트 중엔 자신이 연주하는 피아노에 지나치게 섬세한 면이 있어 심지어는 해외공연을 갈 때 자신의 전용 피아노를 가지고 다닌 경우도 있는데(대표적으로 호로비츠) 리히터는 교회와 학교의 낡은 피아노로 연주를 하든 최고급 첨단 피아노로 연주를 하든 리히터의 연주는 모두 훌륭하다. 리히터가 남긴 명반 리히터를 두고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20세기에 다시 태어난 리스트라고. 또 어떤 이는 20세기에 다시 태어난 모차르트라고도 표현한다. 어떻게 그토록 많은 곡을 다 연주할 수 있으며 도대체 리히터가 연주하지 않은 작곡가의 곡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만큼 리히터는 방대한 연주를 하였고 그만큼의 음반을 남겼다. 사실 그가 남긴 명반이 무엇이냐는 것보다 그가 남긴 음반 중 과연 졸반이 무엇이냐를 찾는 것이 더 쉬운 일일지 모른다.
리히터가 남긴 너무도 방대한 양의 음반들 중에서 가장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음반들이 나온 시기는 그가 처음으로 서방세계에 모습을 드러냈던 바로 1960년을 전후로 한 때이다. 이 때 남겼던 음반들은 너무도 많지만 그 중 너무 유명한 것 몇 가지만 살펴보면 우선 카라얀과 함께 협연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그리고 비스로키와 협연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의 커플링 음반이 있다.
DG에서 발매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과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이 수록된 음반. 라흐마니노프 2번의 경우는 이 음반 이상의 것은 없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의 최정점에 위치하는 단 한 장의 음반이다.
이 두 곡을 좋아하는 팬들이라면 리히터가 남긴 이 음반이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지 다 알 것이다. 한 가지 부연 설명을 하자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이 음반 이상의 것이 없다고 단언해도 좋을 정도의 역사적 연주이지만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은 카라얀의 느린 템포의 반주가 전체적으로 늘어지는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이유로 이 곡을 좋아하는 팬들이 호로비츠의 연주를 더 선호하기도 하는데 리히터의 연주에서 호로비츠만큼의 힘을 느끼고 싶다면 에브게니 므라빈스키와 함께 작업한 음반을 꼭 한 번 들어보시기 바란다.멜로디아에서 나온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과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의 음반. 음질이 좋지 않아 위에 소개한 DG의 음반에 가려 있는 숨겨진 명작이다.
그리고 프라하 공연실황을 담은 15장으로 구성된 음반도 있고 카네기홀 공연실황 음반도 있다.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쇼팽, 슈베르트,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 프로코피예프 등 그 어떤 작곡가의 곡도 이 당시의 리히터가 연주한 곡을 선택해서 듣는다면 최상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완성도를 자랑한다.리히터의 프라하 공연실황을 수록한 음반. 진정 불타오르는 피아노가 어떤 것인지 그 진수를 느낄 수 있다.
리히터의 첫 미국 공연실황 음반. 리히터의 팬이라면 꼭 한 번은 듣고 소장해야 할 가치가 있는 추천 1순위 음반이다. 쇼팽, 라흐마니노프, 프로코피예프의 수많은 난곡들을 압도적인 힘으로 내리찍는 리히터의 무시무시한 타건을 경험할 수 있다. 좀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납량특집용 음반이라고 하겠다.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 연주도 빼놓을 수 없는 명반이다. 리히터의 연주는 프라하 공연과 소피아 공연 실황의 음반이 유명한데 둘 다 흠잡을 수 없는 훌륭한 연주이지만 그래도 보다 정열적이고 피아노가 부서질 듯이 내리찍는 힘은 소피아 공연실황이 더 훌륭하다고 할 수 있겠다.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역시 리히터의 연주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를 매우 잘, 그리고 많이 연주했으나 프로젝트 음반으로 전곡 녹음을 한 것은 없다. 대신 소련의 멜로디아, 미국의 RCA, 필립스 등에 그의 연주들이 있는데 가장 집중적으로 들어봐야 할 연주는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에 걸친 시기의 것이다.
특히 23번 ‘열정’은 꼭 한 번은 들어봐야 할 명연 중의 명연인데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의 다른 작품이라면 몰라도 23번 ‘열정’만은 단연 리히터의 것이 압도적이다. 특히 3악장에서의 따발총을 쏘는 것 같은 그 무시무시한 힘의 연주는 듣는 이의 넋을 빼놓을 지경이다.
필립스에서 발매한 Great Pianists 시리즈. 리히터는 시리즈 3까지 있다. 여기에 수록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3번 ‘열정’은 리히터의 연주 이상의 것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상에서 잠깐 살펴보았듯이 리히터가 남긴 유산은 너무도 많다. 그의 연주 하나하나를 평가하며 그가 남긴 명반들이 무엇이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몇 명의 클래식 음악 전문가들이 밤을 새면서 이야기해도 모자랄지 모른다. 그만큼 리히터는 20세기 음악사에서 중요한 획을 그은 위대한 인물이었고 후세의 그 어떤 피아니스트가 리히터만큼의 업적을 쌓을 수 있을지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그는 진정한 천재였고 천재였지만 매일매일 빠짐없이 연습과 연습을 거듭하며 더 나은 예술세계를 구현했던 노력하는 천재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