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노 발터(Bruno Walter)-천의무봉의 음악을 만든 부드러운 카리스마
Artist Story/Conductor / 2008. 4. 12. 00:21
카리스마의 시대
해군제독, 프로야구 감독, 그리고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미즈노 그룹의 회장이었던 사람은 이상의 세 가지 직업을 남자로서 꼭 한 번쯤은 해볼만한 직업이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남자로서 해볼만한 직업. 미즈노 회장이란 사람이 말한 이들 직업의 특징은 조직의 보스로서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조직원들을 수족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목적하는 바를 이루어내었을 때 만인의 환호와 박수갈채를 받는 매력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다시 핵심 키워드를 꼽아 보자면
등으로 특징을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해군제독이야 선상 위에서 선원의 생사여탈권마저 가질 수 있는 황제에 다름없고 프로야구 감독은 한 시즌의 농사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우승을 하였을 때 수많은 관중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샴페인을 뒤집어쓰고 일년간 희로애락을 같이 한 선수들의 헹가래를 받는 아주 매력적인 직업이다.
그렇다면 오케스트라 지휘자는? 수 십 명의 단원들을 이끌고 전 세계를 누비며 자신이 해석한 곡을 단원들의 연주를 통해 청중들에게 들려주고 공연이 끝난 후 땀이 범벅이 된 얼굴로 기립박수를 받으며 환하게 미소 지을 때의 그 감동. 이 또한 그들만이 누릴 수 있는 진정한 특권 중의 특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이들 직업의 특징은 조직의 수장으로서 조직원 전체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신의 뜻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카리스마에 있다고 할 것이다. 남자만이 가질 수 있는 진정한 카리스마의 직업. 참으로 매력적인 직업이라 아니할 수 없다.
아르투르 토스카니니, 오토 클렘페러, 프리츠 라이너, 조지 셀, 에브게니 므라빈스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세르쥬 첼리비다케...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통솔하기 위해 독재적 카리스마를 유감없이 발휘하며 악명을 드높였던 대표적인 지휘자들이다. 이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대략 이 정도만 쓰자. 하지만 세월이 흐른 후 이들에게 거장, 마에스트로란 이름으로 칭송은 할지언정 이들에게 못된 독재자, 권력자란 이름으로 비난, 비판하진 않는다.
이처럼 20세기를 살았던 수많은 지휘자들은 강력한 카리스마로 점철되어 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 카리스마란 이름은 독재, 전횡이란 나쁜 의미로도 해석되어 단원들과 불화를 일으키기도 했으나 아름다운 연주를 들려주고 좋은 음반을 녹음한 후엔 그들 사이에 있었던 독재, 전횡의 카리스마는 아름다운 멜로디의 뒤에 묻혀버리고 오로지 지휘자의 자상한 얼굴만이 음반의 표지를 장식하게 된다.
이와 같은 과정을 보면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란 직업에 있어서 카리스마란 이름으로 포장된 독재적 권력은 어찌 보면 미덕이라고까지 보이기 마련이다. 미덕으로까지 생각되게 만드는 독재적 카리스마. 그러나 그 카리스마가 없어도 얼마든지 단원들과 함께 유대관계를 돈독히 하며 좋은 음악,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 순 없는 걸까?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단원들의 마음을 움직여 이끄는 지휘자는 없었을까?
극히 예외적인 경우였지만 그런 사람도 물론 있다. 지금부터 이야기하고자 하는 브루노 발터가 바로 그 극히 예외적인 경우의 1순위에 해당되는 사람이었다.
사랑하고 사랑받은 지휘자
단원들과 함께 브람스 2번의 4악장을 리허설 중인 발터. 이때 그의 나이 80이 넘었고 한 번의 은퇴를 번복한 상태였다.
먼저 위의 동영상을 보시기 바란다. 동영상을 보면 나오지만 그는 리허설 중 많은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단원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었다. 그의 모습에서 강압적인 폭군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혹시 위의 동영상을 보면서 폭군형 지휘자는 과연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셨는가?
그렇다면 아래의 동영상을 보시기 바란다. 발터와 같은 시기에 활동했고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지휘자로 손꼽히는 아르투르 토스카니니(Arthur Toscanini)의 리허설 장면이다. 뭐라고 고래고래 소릴 질러대는지 해석이 가능한 분은 알려주시면 또한 고맙겠다.
사람 좋으면 꼴찌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쟁사회에서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선 때론 비정하고 거침없이 누군가를 밟고 올라가야 하고 그렇게 밟고 올라가려면 애초에 좋은 사람이 되길 포기하란 의미일 것이다. 좋은 사람이 되길 포기해서라도 얻어야 하는 그 자리. 내가 살기 위해선 누군가의 피눈물나는 희생이 있어야 한다는 비정한 정글의 법칙. 과연 사랑과 화합으로 모두를 이끌어나가는 공생공존의 세계는 이상에만 존재하는 것일까?
그러나 브루노 발터의 삶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브루노 발터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모차르트의 해석가였고 가장 위대한 말러의 전달자였으며 모두에게 존경받고 모두에게 사랑을 나눠주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멜로디를 남기고 간 진정한 신사였다.
발터는 1876년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유태인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난 그의 이름은 원래 브루노 슐레징어(Bruno Schlesinger)였고 훗날 유태인 성인 슐레징어를 버리게 된다(이 부분에 대해선 발터와 말러의 관계에서 상술하겠다).
발터는 어렸을 적부터 음악에 뛰어난 소질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8세에 슈테른 음악원에 입학하여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9세에 공개연주회를 가졌다. 애초에 그는 피아니스트가 목표였으나 대 지휘자 한스 본 푈로가 바이로이트 연주회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본 후 지휘자의 꿈을 갖기 시작했다. 데뷔는 18세 때였다.
1894년에 쾰른 오페라 극장(Cologne Opera)에서 지휘자로서 처음 데뷔 무대를 가졌고 이듬해엔 함부르트 오페라 극장(Hamburg Opera)에서 chorus director로 일하던 중 향후 그의 음악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중요한 인물을 만나게 된다. 그는 바로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였다.
발터는 이때 말러를 처음 만나게 되었고 그의 1번 교향곡을 들으며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평생동안 말러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하였고 죽을 때까지 말러를 마음속의 스승으로 여기며 존경하고 따랐다. 말러 역시 발터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보고 그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발터는 말러를 만나면서 음악적으로도 많은 영감과 도움을 받았고 그 덕분에 지휘자로서도 한층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이후 1900년 베를린에 돌아오기 전까지 브라티슬라바, 리가 등에서 지휘를 하며 꾸준히 쌓았고 베를린에 돌아와서는 베를린 궁정 가극장 부지휘자가 되었다.
말러와 함께 열어간 성공시대
말러와 발터. 왼쪽의 안경쓴 사람이 말러, 오른쪽 지팡이 든 신사가 발터이다. 말러가 살아있을 때 발터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스승이었고 발터는 말러 사후 그의 음악을 세상에 내놓아 빛을 보게 하였다.
1901년에 발터는 말러의 초청으로 빈궁정가극장의 부지휘자가 되었고 그의 데뷔작은 베르디의 ‘아이다’였다. 발터의 음악인생에서 양질의 토양이 되어 가장 많은 것을 흡수하였던 시기를 꼽자면 바로 이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발터는 이 시기에 말러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바로 이 시기에 슈레징어라는 본래의 성을 버리고 발터라는 새로운 성을 갖게 된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국적을 취득하였다. 그리고 발터의 명성이 전 유럽에 널리 퍼졌던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1911년. 발터에게 평생의 스승이자 좋은 벗이었던 말러가 51세의 짧지만 빛나는 생을 마감하였다. 이에 발터는 말러의 실질적 9번 교향곡인 ‘대지의 노래(Das Lied von der Erde)를 뮌헨에서 초연하였고 이듬해엔 9번 교향곡을 빈에서 초연하며 떠나간 스승을 기렸다.
말러는 어린 시절부터 유태인들이 겪어야만 했던 질곡의 역사를 예외 없이 경험하며 살았으며 그 수난과 모욕을 경험하며 성격이 올곧게 형성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부터 형성된 염세적이고 회의적인 세계관은 훗날 그의 음악세계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그리고 발터 역시 말러와 마찬가지로 유태인이었고 유럽 사회에서 심한 차별을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에 말러의 권유로 그의 유태계 성을 버리고 오스트리아로 국적을 변경하였다.
구스타프 말러의 데스 마스크. 두 입술을 꽉 다물고 영면한 모습이다. 그는 51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음악은 전 세계적으로 열광적인 지지를 얻고 있으니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어 부활하였다.
말러는 대단히 훌륭한 지휘자이자 작곡가였으나 생전에 그가 작곡한 곡들은 전혀 빛을 보지 못했다. 그의 주옥같은 곡들이 빛을 보지 못하고 사장될 뻔한 위기에서 구해준 사람은 바로 발터였다. 발터는 훗날 미국으로 망명한 뒤에 미국 전역을 돌며 말러의 교향곡을 연주하였고 말러 열풍을 일으키게 되었다. 바로 발터가 있었기에 말러는 비로소 작곡가로서도 빛을 보게 되었고 발터는 말러 교향곡 최고의 스페셜리스트로 인정받게 되었다.
말러가 떠난 후 1913년부터 9년간 뮌헨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를 맡았고 1923년엔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맡았다. 그리고 1925년엔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와 샤를로텐베르크 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 1929년엔 푸르트벵글러의 후임으로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가 되며 그의 명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였다.
승승장구할 것만 같았던 좋은 시절. 그러나 발터의 인생에 예기치 못한 암운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아니, 발터뿐만이 아니라 유럽 전체, 전 세계에 공포의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으니 바로 나치와 히틀러였다.
두 번의 망명
왼쪽부터 브루노 발터, 아르투르 토스카니니, 에리히 클라이버(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아버지), 오토 클렘페러, 그리고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20세기 전반기를 이끌었던 대지휘자들이다. 이들 중 푸르트벵글러를 제외한 네 명은 모두 고국을 떠나 정치적 망명을 하였고 푸르트벵글러는 나치의 회유와 협박에 못이겨 부역하게 된다.
1차 대전 이후 실의에 빠진 독일인들에게 적대적 세계관을 심어주며 강한 독일을 만들겠다는 환각을 불어넣어준 나치. 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인종청소였다. 그리고 그 대상에 발터와 같은 영향력 있는 유대인 음악인들이 빠질 리가 없었다.
1933년. 발터는 나치치하의 독일을 떠나 오스트리아에 머물며 빈 국립오페라 극장의 음악감독을 새로 맡게 되었다. 이 시기에 발터는 자신이 맡고 있는 빈 국립오페라 극장의 감독자리 뿐만 아니라 잘츠부르크 음악제를 활성화하는데 많은 노력을 하였고 또한 빈 필의 지휘도 겸하며 매우 정력적인 활동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가 나치치하에 접어들면서 그는 다시 이곳저곳으로 거처를 옮기며 고단한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 첫 번째 망명국은 프랑스였다.
프랑스에서 레코딩 활동을 하는동안 프랑스 정부에선 그에게 시민권을 주었고 그는 다시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게 되었다. 그가 프랑스에 있는 동안 그의 딸은 빈에 체류한 상태로 나치의 감시를 받고 있었는데 발터는 그들의 구명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전해진다.
1939년 11월. 발터는 안전한 피신처를 찾아 또 한 번의 망명을 하게 된다. 드보르작이 그토록 감탄했던 New World, 신천지 미국이었다. 이 당시에 발터와 함께 망명한 음악가들은 토스카니니, 클렘페러, 스트라빈스키 등이었다. 1차대전을 승리함으로서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급부상하였으나 문화예술의 불모지였던 미국은 이들의 망명을 쌍수를 들고 환영하였다.
젊은 시절부터 이미 전 유럽을 대상으로 그의 명성을 널리 알리고 있었던 발터. 신천지 미국은 그에게 또 다른 기회의 땅, 또 한 번의 비상을 준비하고 있었다. 미국으로 간 발터는 미국 내의 수많은 오케스트라를 거치며 그들을 조련했고 자신의 음악세계를 맘껏 펼칠 수 있었다.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CSO), LA 필, NBC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필 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맡았고 뉴욕 필의 adviser 역을 하며(뉴욕 필에선 당연히 발터에게 총감독 자리를 제의했으나 발터가 고사했다) 화려한 경력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이다.
종전 이후 발터는 다시 유럽무대를 다니며 화려한 연주여행을 시작하였고 객원지휘자로 애딘버러 음악제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56년, 그의 나이 80세 되던 해. 발터는 건강상의 이유로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잡았던 지휘봉을 놓게 된다. 불과 3년 전 거장 푸르트벵글러가 세상을 떠났고 토스카니니 역시 은퇴를 선언한 마당에 발터마저 은퇴를 한다는 것. 20세기 전반을 이끌었던 트로이카 시대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고 생각한 많은 음악팬들은 못내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생의 마지막 힘을 다한 또 한 번의 비상(飛上)
말년의 브루노 발터. 그는 80세가 넘은 고령과 악화된 건강에도 불구하고 세기의 명반들을 남겼다.
발터는 1920년대 중반, 그러니까 그의 나이 50이 다된 시점부터 레코딩을 시작하였다. 그 역시 19세기에 태어난 다른 거장들과 마찬가지로 레코딩의 혜택을 많이 볼 수 없었던 대표적인 인물이었는데 이는 레코딩한 음반의 양적인 면뿐만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혜택을 볼 수 없었다는 말이 된다. 그 이유는 1950년대 후반에서야 비로소 스테레오 레코딩 기술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첨언하자면 바로 이 때문에 푸르트벵글러의 열혈팬(나를 비롯하여)들은 푸르트벵글러가 10년만 더 늦게 태어났거나 10년만 더 늦게 세상을 뜨지 못한 점을 무척 아쉬워한다. 푸르트벵글러의 대부분의 음반은 무척 조악한 음질로 녹음되었기 때문이다. 가고 싶지만 돌이킬 수 없는 그 시절이란 공허한 구호를 외치면서.
스테레오 녹음방식이 음반시장에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1950년대 후반. 기존의 찌직거리는 비내리는 소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맑고 깨끗한 소리를 자랑하는 스테레오 음질은 음반시장 전체를 송두리째 바꿀 수 있을만큼 파괴력이 컸다. 그리고 CBS라는 메이저 음반사에서 이처럼 어마어마한 돈벌이가 보이는 이와 같은 호재를 놓칠 리가 없었다. 유럽에서의 난리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유능한 음악가들을 모조리 스카웃하여 급조된 교향악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CBS가 구상하고 있는 대형 프로젝트의 화룡점정, 그들의 사업구상에 마지막 하나의 돌을 올려줄 위대한 지휘자는 바로 발터뿐이었다.
이처럼 CBS는 전쟁의 포화를 피해 유럽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뛰어난 예술인들이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고 예술활동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도록 해준 안식처이자 보금자리였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당시 미국의 입장에서는 세계적인 군사, 경제의 강대국인 반면에 문화에 있어선 불모지이자 드보르작의 표현대로 'New World'일 수밖에 없었고 이에 대한 문화적 열등감이 상당했던 터에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을 신청한 수많은 예술가들의 자발적인 유입은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유럽에서 신천지 미국으로 망명한 음악가들의 이름을 대보자면
스트라빈스키, 라흐마니노프, 토스카니니, 발터, 클렘페러, 하이페츠, 호로비츠, 밀스타인...딱 여기까지만 쓰자.
이렇게 수많은 예술가들이 미국이란 신천지에 자발적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이는 예술뿐만이 아닌 과학, 경제, 인문학 등의 모든 학문분야에 있어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풍부한 자원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세계제일의 강국으로 도약할 준비가 되어 있던 미국은 세계 최고급의 인재들이 저절로 유입되면서 인적 인프라를 자연스럽게 구성할 수 있었으니 바로 이들로 인해 유럽은 몇 백년간 이어왔던 세계 중심의 자리를 신대륙 미국에게 넘겨주었던 것이다.
참 부러운 일이다. 우리나라는 어느 나라에서 전쟁이 나서 우리나라로 피난을 올 일이 있었던가? 우리가 도망다니기 바빴지. 또 설령 일본에서 내란, 혹은 대지진이 일어나서 우리나라로 온다한들 그들을 맞아줄 준비가 되었는가? 이런 점도 한 번은 곰곰이 생각해볼 일이다.
유럽에서 망명을 통해 미국이란 신천지로 들어온 뛰어난 예술가들을 미국에선 최적의 환경을 조성해주며 극진히 배려해주었다.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 탄생한 오케스트라가 토스카니니의 NBC, 그리고 발터의 컬럼비아 심포니 오케스트라이다.
당시의 NBC나 컬럼비아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멤버들을 보면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는데 유럽에서 이름을 날리던 독주자들이나 현악사중주의 멤버들이 '일개' 오케스트라의 단원이 되었던 것이다.
미국에선 이렇게도 뛰어난 음악가들을 오케스트라의 단원으로도 배치할 수 있는 두 번 다시없을 뛰어난 인재풀의 인플레에 환호성을 질렀을 터이고 이토록 넘치는 인재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는 70세의 토스카니니와 81세의 발터에게 나이와 건강을 생각할 이유도 없을 정도로 너무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올스타팀을 맡아 한 시즌을 꾸리게 된 프로야구 감독이 가질 수 있는 기분이랄까? 그렇게 만들어진 이 최고의 오케스트라는 역시 최고의 거장의 지휘를 통해 최고의 음악들을 만들었으니 음악예술의 본령이자 정점인 베를린 필, 빈 필의 명성에도 결코 뒤지지 않은 그들만의 전설을 써내려갔다.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브루크너, 슈만, 브람스, 드보르작, 말러 교향곡과 협주곡 등 최대한 짧은 시간동안 최대한 많은 곡을 레코딩하며 불후의 명반들을 참으로 많이도 남겼으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은 80세 노인네의 바짓가랭이를 붙잡고 끈덕지게도 설득한 CBS 스카우터와 그토록 고령이었고 좋지 않았던 건강에도 불구하고 생의 마지막 혼을 불태워준 발터에게 무척이나 감사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80이 넘은 황혼의 나이에 생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수많은 명반을 만들었던 발터는 1962년 2월 17일에 비버리 힐스에 있는 그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모차르트의 해석가였고 가장 위대한 말러의 전달자였으며 20세기 전반을 이끌었던 거장 3인방 중 마지막까지 남았던 거장은 그렇게 빛나는 생을 마감하였던 것이다.
브루노 발터와 전설의 콜롬비아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모차르트의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Eine Kleine Nachtmusik, K 525)' 中 1악장 Allegro.
해군제독, 프로야구 감독, 그리고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미즈노 그룹의 회장이었던 사람은 이상의 세 가지 직업을 남자로서 꼭 한 번쯤은 해볼만한 직업이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남자로서 해볼만한 직업. 미즈노 회장이란 사람이 말한 이들 직업의 특징은 조직의 보스로서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조직원들을 수족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목적하는 바를 이루어내었을 때 만인의 환호와 박수갈채를 받는 매력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다시 핵심 키워드를 꼽아 보자면
1. 조직
2. 보스
3. 강한 카리스마
2. 보스
3. 강한 카리스마
등으로 특징을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해군제독이야 선상 위에서 선원의 생사여탈권마저 가질 수 있는 황제에 다름없고 프로야구 감독은 한 시즌의 농사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우승을 하였을 때 수많은 관중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샴페인을 뒤집어쓰고 일년간 희로애락을 같이 한 선수들의 헹가래를 받는 아주 매력적인 직업이다.
그렇다면 오케스트라 지휘자는? 수 십 명의 단원들을 이끌고 전 세계를 누비며 자신이 해석한 곡을 단원들의 연주를 통해 청중들에게 들려주고 공연이 끝난 후 땀이 범벅이 된 얼굴로 기립박수를 받으며 환하게 미소 지을 때의 그 감동. 이 또한 그들만이 누릴 수 있는 진정한 특권 중의 특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이들 직업의 특징은 조직의 수장으로서 조직원 전체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신의 뜻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카리스마에 있다고 할 것이다. 남자만이 가질 수 있는 진정한 카리스마의 직업. 참으로 매력적인 직업이라 아니할 수 없다.
아르투르 토스카니니, 오토 클렘페러, 프리츠 라이너, 조지 셀, 에브게니 므라빈스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세르쥬 첼리비다케...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통솔하기 위해 독재적 카리스마를 유감없이 발휘하며 악명을 드높였던 대표적인 지휘자들이다. 이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대략 이 정도만 쓰자. 하지만 세월이 흐른 후 이들에게 거장, 마에스트로란 이름으로 칭송은 할지언정 이들에게 못된 독재자, 권력자란 이름으로 비난, 비판하진 않는다.
이처럼 20세기를 살았던 수많은 지휘자들은 강력한 카리스마로 점철되어 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 카리스마란 이름은 독재, 전횡이란 나쁜 의미로도 해석되어 단원들과 불화를 일으키기도 했으나 아름다운 연주를 들려주고 좋은 음반을 녹음한 후엔 그들 사이에 있었던 독재, 전횡의 카리스마는 아름다운 멜로디의 뒤에 묻혀버리고 오로지 지휘자의 자상한 얼굴만이 음반의 표지를 장식하게 된다.
이와 같은 과정을 보면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란 직업에 있어서 카리스마란 이름으로 포장된 독재적 권력은 어찌 보면 미덕이라고까지 보이기 마련이다. 미덕으로까지 생각되게 만드는 독재적 카리스마. 그러나 그 카리스마가 없어도 얼마든지 단원들과 함께 유대관계를 돈독히 하며 좋은 음악,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 순 없는 걸까?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단원들의 마음을 움직여 이끄는 지휘자는 없었을까?
극히 예외적인 경우였지만 그런 사람도 물론 있다. 지금부터 이야기하고자 하는 브루노 발터가 바로 그 극히 예외적인 경우의 1순위에 해당되는 사람이었다.
사랑하고 사랑받은 지휘자
단원들과 함께 브람스 2번의 4악장을 리허설 중인 발터. 이때 그의 나이 80이 넘었고 한 번의 은퇴를 번복한 상태였다.
먼저 위의 동영상을 보시기 바란다. 동영상을 보면 나오지만 그는 리허설 중 많은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단원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었다. 그의 모습에서 강압적인 폭군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혹시 위의 동영상을 보면서 폭군형 지휘자는 과연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셨는가?
그렇다면 아래의 동영상을 보시기 바란다. 발터와 같은 시기에 활동했고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지휘자로 손꼽히는 아르투르 토스카니니(Arthur Toscanini)의 리허설 장면이다. 뭐라고 고래고래 소릴 질러대는지 해석이 가능한 분은 알려주시면 또한 고맙겠다.
사람 좋으면 꼴찌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쟁사회에서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선 때론 비정하고 거침없이 누군가를 밟고 올라가야 하고 그렇게 밟고 올라가려면 애초에 좋은 사람이 되길 포기하란 의미일 것이다. 좋은 사람이 되길 포기해서라도 얻어야 하는 그 자리. 내가 살기 위해선 누군가의 피눈물나는 희생이 있어야 한다는 비정한 정글의 법칙. 과연 사랑과 화합으로 모두를 이끌어나가는 공생공존의 세계는 이상에만 존재하는 것일까?
그러나 브루노 발터의 삶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브루노 발터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모차르트의 해석가였고 가장 위대한 말러의 전달자였으며 모두에게 존경받고 모두에게 사랑을 나눠주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멜로디를 남기고 간 진정한 신사였다.
발터는 1876년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유태인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난 그의 이름은 원래 브루노 슐레징어(Bruno Schlesinger)였고 훗날 유태인 성인 슐레징어를 버리게 된다(이 부분에 대해선 발터와 말러의 관계에서 상술하겠다).
발터는 어렸을 적부터 음악에 뛰어난 소질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8세에 슈테른 음악원에 입학하여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9세에 공개연주회를 가졌다. 애초에 그는 피아니스트가 목표였으나 대 지휘자 한스 본 푈로가 바이로이트 연주회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본 후 지휘자의 꿈을 갖기 시작했다. 데뷔는 18세 때였다.
1894년에 쾰른 오페라 극장(Cologne Opera)에서 지휘자로서 처음 데뷔 무대를 가졌고 이듬해엔 함부르트 오페라 극장(Hamburg Opera)에서 chorus director로 일하던 중 향후 그의 음악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중요한 인물을 만나게 된다. 그는 바로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였다.
발터는 이때 말러를 처음 만나게 되었고 그의 1번 교향곡을 들으며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평생동안 말러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하였고 죽을 때까지 말러를 마음속의 스승으로 여기며 존경하고 따랐다. 말러 역시 발터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보고 그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발터는 말러를 만나면서 음악적으로도 많은 영감과 도움을 받았고 그 덕분에 지휘자로서도 한층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이후 1900년 베를린에 돌아오기 전까지 브라티슬라바, 리가 등에서 지휘를 하며 꾸준히 쌓았고 베를린에 돌아와서는 베를린 궁정 가극장 부지휘자가 되었다.
말러와 함께 열어간 성공시대
말러와 발터. 왼쪽의 안경쓴 사람이 말러, 오른쪽 지팡이 든 신사가 발터이다. 말러가 살아있을 때 발터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스승이었고 발터는 말러 사후 그의 음악을 세상에 내놓아 빛을 보게 하였다.
1901년에 발터는 말러의 초청으로 빈궁정가극장의 부지휘자가 되었고 그의 데뷔작은 베르디의 ‘아이다’였다. 발터의 음악인생에서 양질의 토양이 되어 가장 많은 것을 흡수하였던 시기를 꼽자면 바로 이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발터는 이 시기에 말러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바로 이 시기에 슈레징어라는 본래의 성을 버리고 발터라는 새로운 성을 갖게 된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국적을 취득하였다. 그리고 발터의 명성이 전 유럽에 널리 퍼졌던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1911년. 발터에게 평생의 스승이자 좋은 벗이었던 말러가 51세의 짧지만 빛나는 생을 마감하였다. 이에 발터는 말러의 실질적 9번 교향곡인 ‘대지의 노래(Das Lied von der Erde)를 뮌헨에서 초연하였고 이듬해엔 9번 교향곡을 빈에서 초연하며 떠나간 스승을 기렸다.
말러는 어린 시절부터 유태인들이 겪어야만 했던 질곡의 역사를 예외 없이 경험하며 살았으며 그 수난과 모욕을 경험하며 성격이 올곧게 형성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부터 형성된 염세적이고 회의적인 세계관은 훗날 그의 음악세계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그리고 발터 역시 말러와 마찬가지로 유태인이었고 유럽 사회에서 심한 차별을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에 말러의 권유로 그의 유태계 성을 버리고 오스트리아로 국적을 변경하였다.
구스타프 말러의 데스 마스크. 두 입술을 꽉 다물고 영면한 모습이다. 그는 51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음악은 전 세계적으로 열광적인 지지를 얻고 있으니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어 부활하였다.
말러는 대단히 훌륭한 지휘자이자 작곡가였으나 생전에 그가 작곡한 곡들은 전혀 빛을 보지 못했다. 그의 주옥같은 곡들이 빛을 보지 못하고 사장될 뻔한 위기에서 구해준 사람은 바로 발터였다. 발터는 훗날 미국으로 망명한 뒤에 미국 전역을 돌며 말러의 교향곡을 연주하였고 말러 열풍을 일으키게 되었다. 바로 발터가 있었기에 말러는 비로소 작곡가로서도 빛을 보게 되었고 발터는 말러 교향곡 최고의 스페셜리스트로 인정받게 되었다.
말러가 떠난 후 1913년부터 9년간 뮌헨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를 맡았고 1923년엔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맡았다. 그리고 1925년엔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와 샤를로텐베르크 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 1929년엔 푸르트벵글러의 후임으로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가 되며 그의 명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였다.
승승장구할 것만 같았던 좋은 시절. 그러나 발터의 인생에 예기치 못한 암운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아니, 발터뿐만이 아니라 유럽 전체, 전 세계에 공포의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으니 바로 나치와 히틀러였다.
두 번의 망명
왼쪽부터 브루노 발터, 아르투르 토스카니니, 에리히 클라이버(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아버지), 오토 클렘페러, 그리고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20세기 전반기를 이끌었던 대지휘자들이다. 이들 중 푸르트벵글러를 제외한 네 명은 모두 고국을 떠나 정치적 망명을 하였고 푸르트벵글러는 나치의 회유와 협박에 못이겨 부역하게 된다.
1차 대전 이후 실의에 빠진 독일인들에게 적대적 세계관을 심어주며 강한 독일을 만들겠다는 환각을 불어넣어준 나치. 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인종청소였다. 그리고 그 대상에 발터와 같은 영향력 있는 유대인 음악인들이 빠질 리가 없었다.
1933년. 발터는 나치치하의 독일을 떠나 오스트리아에 머물며 빈 국립오페라 극장의 음악감독을 새로 맡게 되었다. 이 시기에 발터는 자신이 맡고 있는 빈 국립오페라 극장의 감독자리 뿐만 아니라 잘츠부르크 음악제를 활성화하는데 많은 노력을 하였고 또한 빈 필의 지휘도 겸하며 매우 정력적인 활동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가 나치치하에 접어들면서 그는 다시 이곳저곳으로 거처를 옮기며 고단한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 첫 번째 망명국은 프랑스였다.
프랑스에서 레코딩 활동을 하는동안 프랑스 정부에선 그에게 시민권을 주었고 그는 다시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게 되었다. 그가 프랑스에 있는 동안 그의 딸은 빈에 체류한 상태로 나치의 감시를 받고 있었는데 발터는 그들의 구명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전해진다.
1939년 11월. 발터는 안전한 피신처를 찾아 또 한 번의 망명을 하게 된다. 드보르작이 그토록 감탄했던 New World, 신천지 미국이었다. 이 당시에 발터와 함께 망명한 음악가들은 토스카니니, 클렘페러, 스트라빈스키 등이었다. 1차대전을 승리함으로서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급부상하였으나 문화예술의 불모지였던 미국은 이들의 망명을 쌍수를 들고 환영하였다.
젊은 시절부터 이미 전 유럽을 대상으로 그의 명성을 널리 알리고 있었던 발터. 신천지 미국은 그에게 또 다른 기회의 땅, 또 한 번의 비상을 준비하고 있었다. 미국으로 간 발터는 미국 내의 수많은 오케스트라를 거치며 그들을 조련했고 자신의 음악세계를 맘껏 펼칠 수 있었다.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CSO), LA 필, NBC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필 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맡았고 뉴욕 필의 adviser 역을 하며(뉴욕 필에선 당연히 발터에게 총감독 자리를 제의했으나 발터가 고사했다) 화려한 경력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이다.
종전 이후 발터는 다시 유럽무대를 다니며 화려한 연주여행을 시작하였고 객원지휘자로 애딘버러 음악제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56년, 그의 나이 80세 되던 해. 발터는 건강상의 이유로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잡았던 지휘봉을 놓게 된다. 불과 3년 전 거장 푸르트벵글러가 세상을 떠났고 토스카니니 역시 은퇴를 선언한 마당에 발터마저 은퇴를 한다는 것. 20세기 전반을 이끌었던 트로이카 시대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고 생각한 많은 음악팬들은 못내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생의 마지막 힘을 다한 또 한 번의 비상(飛上)
말년의 브루노 발터. 그는 80세가 넘은 고령과 악화된 건강에도 불구하고 세기의 명반들을 남겼다.
발터는 1920년대 중반, 그러니까 그의 나이 50이 다된 시점부터 레코딩을 시작하였다. 그 역시 19세기에 태어난 다른 거장들과 마찬가지로 레코딩의 혜택을 많이 볼 수 없었던 대표적인 인물이었는데 이는 레코딩한 음반의 양적인 면뿐만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혜택을 볼 수 없었다는 말이 된다. 그 이유는 1950년대 후반에서야 비로소 스테레오 레코딩 기술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첨언하자면 바로 이 때문에 푸르트벵글러의 열혈팬(나를 비롯하여)들은 푸르트벵글러가 10년만 더 늦게 태어났거나 10년만 더 늦게 세상을 뜨지 못한 점을 무척 아쉬워한다. 푸르트벵글러의 대부분의 음반은 무척 조악한 음질로 녹음되었기 때문이다. 가고 싶지만 돌이킬 수 없는 그 시절이란 공허한 구호를 외치면서.
스테레오 녹음방식이 음반시장에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1950년대 후반. 기존의 찌직거리는 비내리는 소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맑고 깨끗한 소리를 자랑하는 스테레오 음질은 음반시장 전체를 송두리째 바꿀 수 있을만큼 파괴력이 컸다. 그리고 CBS라는 메이저 음반사에서 이처럼 어마어마한 돈벌이가 보이는 이와 같은 호재를 놓칠 리가 없었다. 유럽에서의 난리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유능한 음악가들을 모조리 스카웃하여 급조된 교향악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CBS가 구상하고 있는 대형 프로젝트의 화룡점정, 그들의 사업구상에 마지막 하나의 돌을 올려줄 위대한 지휘자는 바로 발터뿐이었다.
이처럼 CBS는 전쟁의 포화를 피해 유럽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뛰어난 예술인들이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고 예술활동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도록 해준 안식처이자 보금자리였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당시 미국의 입장에서는 세계적인 군사, 경제의 강대국인 반면에 문화에 있어선 불모지이자 드보르작의 표현대로 'New World'일 수밖에 없었고 이에 대한 문화적 열등감이 상당했던 터에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을 신청한 수많은 예술가들의 자발적인 유입은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유럽에서 신천지 미국으로 망명한 음악가들의 이름을 대보자면
스트라빈스키, 라흐마니노프, 토스카니니, 발터, 클렘페러, 하이페츠, 호로비츠, 밀스타인...딱 여기까지만 쓰자.
이렇게 수많은 예술가들이 미국이란 신천지에 자발적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이는 예술뿐만이 아닌 과학, 경제, 인문학 등의 모든 학문분야에 있어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풍부한 자원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세계제일의 강국으로 도약할 준비가 되어 있던 미국은 세계 최고급의 인재들이 저절로 유입되면서 인적 인프라를 자연스럽게 구성할 수 있었으니 바로 이들로 인해 유럽은 몇 백년간 이어왔던 세계 중심의 자리를 신대륙 미국에게 넘겨주었던 것이다.
참 부러운 일이다. 우리나라는 어느 나라에서 전쟁이 나서 우리나라로 피난을 올 일이 있었던가? 우리가 도망다니기 바빴지. 또 설령 일본에서 내란, 혹은 대지진이 일어나서 우리나라로 온다한들 그들을 맞아줄 준비가 되었는가? 이런 점도 한 번은 곰곰이 생각해볼 일이다.
유럽에서 망명을 통해 미국이란 신천지로 들어온 뛰어난 예술가들을 미국에선 최적의 환경을 조성해주며 극진히 배려해주었다.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 탄생한 오케스트라가 토스카니니의 NBC, 그리고 발터의 컬럼비아 심포니 오케스트라이다.
당시의 NBC나 컬럼비아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멤버들을 보면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는데 유럽에서 이름을 날리던 독주자들이나 현악사중주의 멤버들이 '일개' 오케스트라의 단원이 되었던 것이다.
미국에선 이렇게도 뛰어난 음악가들을 오케스트라의 단원으로도 배치할 수 있는 두 번 다시없을 뛰어난 인재풀의 인플레에 환호성을 질렀을 터이고 이토록 넘치는 인재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는 70세의 토스카니니와 81세의 발터에게 나이와 건강을 생각할 이유도 없을 정도로 너무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올스타팀을 맡아 한 시즌을 꾸리게 된 프로야구 감독이 가질 수 있는 기분이랄까? 그렇게 만들어진 이 최고의 오케스트라는 역시 최고의 거장의 지휘를 통해 최고의 음악들을 만들었으니 음악예술의 본령이자 정점인 베를린 필, 빈 필의 명성에도 결코 뒤지지 않은 그들만의 전설을 써내려갔다.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브루크너, 슈만, 브람스, 드보르작, 말러 교향곡과 협주곡 등 최대한 짧은 시간동안 최대한 많은 곡을 레코딩하며 불후의 명반들을 참으로 많이도 남겼으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은 80세 노인네의 바짓가랭이를 붙잡고 끈덕지게도 설득한 CBS 스카우터와 그토록 고령이었고 좋지 않았던 건강에도 불구하고 생의 마지막 혼을 불태워준 발터에게 무척이나 감사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80이 넘은 황혼의 나이에 생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수많은 명반을 만들었던 발터는 1962년 2월 17일에 비버리 힐스에 있는 그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모차르트의 해석가였고 가장 위대한 말러의 전달자였으며 20세기 전반을 이끌었던 거장 3인방 중 마지막까지 남았던 거장은 그렇게 빛나는 생을 마감하였던 것이다.
브루노 발터와 전설의 콜롬비아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모차르트의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Eine Kleine Nachtmusik, K 525)' 中 1악장 Alleg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