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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거쉰과 그의 친형이자 음악적 파트너였던 아이라 거쉰의 캐리커쳐. 얼굴이 길쭉하게 그린 사람이 조지, 머리가 벗겨진 사람이 아이라이다.


20세기를 넘어 21세기의 지금에까지 미국은 헐리우드 영화, pop music, music video로 대표되는 영상과 음악을 비롯한 모든 대중문화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막대한 자본, 뛰어난 인재풀, 그리고 전 세계 공용어인 영어가 미치는 파급력까지 겸비한 미국의 문화 컨텐츠 생산력은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감히 넘볼 수 없을 정도이다. 아마 미국만큼 언어와 인종을 넘어 전 세계인을 상대로 엔터테인먼트 마케팅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는 나라는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란 나라는 20세기 초반만 해도 문화예술의 불모지였고 전혀 두각을 나타낼 수 없었던 변방국에 불과했다. 이는 당연한 일이다. 문화예술이란 분야는 국방력, 경제력 등과는 별개로 오랜 역사, 즉 시간과 비례하여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중반을 넘어 유럽에서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이 발발하였을 때 난리통을 피해 신천지 미국으로 망명을 해온 예술가들이 미국의 문화예술에 눈부신 발전을 불러일으킨 원동력임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클래식 음악이란 분야로 국한하여 생각할 때 20세기 중반까지 미국의 음악가들은 미국에서 나고 자라서 교육을 받고 미국만의, 미국적인 음악을 작곡한 'Pure American'은 전무하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대부분의 음악예술가들은 유럽에서 망명을 해서 미국에 정착을 한 것이 대부분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클래식 음악이란 것 자체가 유럽에서 태동을 한, 유럽의 몇몇 나라에서 몇 백년간 살았던 작곡가들이 작곡한 곡이기에 더더욱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도 있다. 바로 조지 거쉰(George Gershwin)이 그 예외적인 경우의 첫 번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피아노앞에 앉은 조지 거쉰. 어릴적 그의 형때문에 그의 부모는 피아노를 구입했으나 정작 피아노를 더 잘치고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던 이는 동생 조지였다.


조지 거쉰은 1989년 브루클린의 빈민촌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러시아에서 이민을 온 유태인이었다. 집안은 가난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였기에 그의 부모는 피아노를 구입해주었다고 한다. 원래 그의 형인 아이라 거쉰이 음악을 좋아하여 피아노를 구입하였으나 알고 보니 조지가 더 음악적인 재능이 뛰어났고 피아노를 더 잘 연주하였다.

12세때부터 피아노를 연주하고 작곡에 관심을 가진 그는 16세엔 음악의 세계에 완전히 매료되어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리믹 악보 출판사에 들어가 피아니스트로 일하게 된다.
거쉰이 스타 작곡가로서 이름을 얻게 된 것은 그의 나이 26세인 1924년이었다. 블루 먼데이(Blue Monday)라는 오페라타를 습작한 것을 당대의 실력자였던 재즈 밴드 지휘자인 화이트먼이 째즈 심포니로 편곡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 곡이 바로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우울한 광시곡, 'Rhapsody in Blue'이다.


Rhapsody in Blue를 연주, 지휘하고 있는 레너드 번스타인. 그는 거쉰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지휘자이며 연주자임과 동시에 작곡가였다.

Rhapsody in Blue의 큰 성공 이후에도 거쉰의 성공가도는 거침이 없었다. 1925년엔 'Concerto in F', 그리고 1926년엔 'Prelude of Piano'를 연달아 발표하며 크나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의 성공은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작사가로 활동했던 그의 형 아이라와 함께 뮤지컬을 작곡하며 브로드웨이에서 성공적인 공연을 거두었고 뮤지컬하면 브로드웨이가 떠오르는 것은 바로 이 당시 거쉰 형제의 활약이 시초가 된 것이다.

미국에서 성장하였고 20대 중반의 젊다 못해 어린 나이에 이미 미국적인 음악을 가장 만드는 거장으로 우뚝 섰던 거쉰. 하지만 항상 정통 클래식 음악에 대한 동경이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고 자신의 실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더 많은 공부를 해야겠다고 늘 마음먹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1928년엔 프랑스에 가서 모리스 라벨의 제자가 되길 원했다. 하지만 라벨이 일류 거쉰이 왜 이류 라벨이 되길 원하느냐며 가르침을 받고 싶어 하는 거쉰을 정중히 사양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뿐만 아니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에게도 배움을 청했으나 스트라빈스키는 오히려 그가 거쉰의 제자가 되고 싶어 했다는 농담같은 일화도 있다.(스트라빈스키가 거쉰에게 일년 수입이 얼마나 되냐고 묻자 10만 달러쯤 된다고 하자 스트라빈스키가 오히려 자신이 그의 제자가 되어야겠다고 말했다)

모리스 라벨(L)과 이고르 스트라빈스키(R)의 모습. 두 사람 모두 시대의 이단아이며 천재작곡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처럼 거쉰은 이미 젊은 나이에 최고의 작곡가로 명성을 휘날리고 있었지만 늘 겸손한 자세로 무언가를 끝없이 배우려 노력했고 노력한 만큼 뛰어난 작품들을 남겼다.

1930년대에도 거쉰의 명성은 계속 이어졌다. 랩소디 인 블루, 파리의 미국인과 함께 더불어 거쉰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며 걸작으로 평가받는 오페라 포기와 베스(Porgy and Bess)를 발표하며 다시금 크나큰 명성을 누리게 된다. 이 작품은 흑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최초의 오페라란 점에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흑인빈민가에서만 느낄 수 있는 깊고 진한 삶의 애환을 그렸고 대단히 통속적인 내용을 그리고 있다.

수많은 영화음악을 비롯한 팝, 대중음악과 협주곡, 관현악곡, 오페라까지 작곡하며 음악의 세계에서 끝없이 자기영역을 확대하며 젊은 나이에 이미 정상의 위치에 올랐던 거쉰. 그러나 신의 도구로 쓰여진 시간은 39년 뿐이었다. 1937년 39세의 아직은 젊디 젊은 나이에 그는 뇌종양이라는 충격적인 병에 걸리게 되었고 그만 아깝게도 세상과 작별하였다. 이탈리아 출신의 대 지휘자인 토스카니니는 거쉰의 사망 이후 랩소디 인 블루를 지휘하였다. 그리고 거쉰을 두고 평하길 진정 유일한 미국음악인이라고 하였다. 거쉰은 아직은 음악예술의 불모지 중의 불모지였던 미국 땅에 태어나 미국만의, 미국적인 클래식 음악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고 세상을 떠난 선구자였다.

거쉰의 음악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거쉰은 가장 미국적인, 미국만의 음악을 작곡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는 여러 나라, 여러 인종들이 뒤섞여 미국이란 나라를 만들었듯이 음악 역시 여러 가지 장르의 음악을 혼합하여 hybrid music, crossover music을 만들었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거쉰의 음악은 딱히 장르를 구분지어서 정의하기 어렵다. 정통 클래식이라고 부르기에도 어렵고 째즈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다. 째즈같은 클래식, 클래식같은 째즈, 팝같은 클래식, 클래식 같은 팝. 이처럼 여러 가지 음악들이 혼합되어 있는 것이 거쉰 음악의 가장 큰 특징이다. 즉, 거쉰은 20세기 음악사에 거쉰풍의 음악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첫 번째 시조인 것이다.

팝도 많이 작곡했다. 무려 400여편에 이른다. 너무도 유명한 썸머 타임(Summer Time)이란 노래가 거쉰의 오페라 포기와 베쓰에 삽입된 곡이란 사실. 이 글을 보고 있는 분들 중에서도 처음 알게 된 분들 많을 것이다. 그렇지?


끈적끈적한 소울풍의 음악 썸머 타임. 거쉰의 가장 유명한 오페라인 포기와 베쓰의 삽입곡이다.

영화음악도 작곡했다. Shall We Dance의 영화음악을 작곡한 사람도 바로 거쉰이다. 그 외에 4편의 뮤지컬을 작곡했고 협주곡, 관현악곡 등의 정통 클래식은 20여곡을 남겼다.
거쉰은 후세의 작곡가, 지휘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남겼다. 
 
거쉰의 음악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한다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멜로디가 있다는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경쾌한 것 같지만 때론 우울하면서 가볍게 들을 수 있지만 경박하지만은 않는 절묘한 매력을 살린 멜로디가 그의 음악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내놓을 수 있는 특징이다.

요즘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성질 드러운 지휘자 강마에(김명민)는 이런 대사를 날린다. 클래식 음악은 그 옛날 귀족들의 여가선용을 위해 작곡된 곡이며 귀족들만을 위한 음악이라고. 그래서 천한 사람들은 클래식 음악을 들을 가치도 없고 들어서도 안 된다고. 이 대사에서 이야기하듯이 클래식 음악이란 장르 자체가 대중성을 담보하기엔 애초부터 글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음악이란 음표를 오선지에 남기는 순간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어지러운 음표들을 누군가 연주해주고 누군가 노래를 불러주는 무한복제를 통해서만 끝없는 생명력을 이어갈 수 있다. 만일 20세기 음악사에 거쉰과 같은 다분히 대중적이고 속물적인 음악을 작곡했다고 혹평도 받았던 작곡가가 없었다면 클래식 음악이란 장르는 영영 대중과 친해질 기회조차 가질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클래식 음악만의 고독한 순혈주의. 그 순혈주의와 마이너리즘에서 오는 상대적 우월감. 하지만 그게 과연 바람직하기만 한 것일까?

Posted by sni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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