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자르 베르만-번개같은 기교의 피아니스트
라자르 베르만(Lazar Berman). 40대 중반까지 철의 장막을 벗어나지 못했던, 그래서 신비롭게만 여겨졌던 최고의 기교파 피아니스트. 그가 철의 장막을 뚫고 처음으로 서방세계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모든 이들은 경악과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번개의 피아니스트-세상을 경악케 하다
라자르 베르만은 구 소련 출신으로 철의 장막 저쪽에서 활약하며 최고의 기교를 뽐내던 대 피아니스트였다. 세상을 놀라게 한 무시무시한 기교와 함께 중저음의 우울한 낭만이 가득 담긴, 독특한 서정이 실린 연주를 구사한 당대 최고의 기교파 피아니스트로 손꼽힌다.
해롤드 숀버그(음악평론가)-그는 20개의 손가락으로 불을 뿜는 듯한 연주를 한다.
그 외의 반응-호로비츠와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비르투오소. 리히터의 뒤를 잇는 러시아의 거장
천재적인 예술가들을 이야기 할 때 어린 시절에 보인 천재성에 대한 부분은 너무도 당연하다시피 한 것이라 식상하지만 베르만 역시 어린 시절 대단한 천재였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2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3살 때 레닌그라드 음악원에 입학, 7살 때 모차르트와 쇼팽을 연주. 그런데 이 아이는 악보를 전혀 볼 줄 모르는 아이였다. 후~ 이 정도야 뭐.
그러나 라자르 베르만은 동시대를 살았던 이들이 극찬한 것만큼 화려하고 환호받은 인생만을 산 것은 결코 아니었다. 실력과 기교에 있어선 어느 누구도 넘보기 힘들만큼 무시무시한 피아니스트였으나 가난과 싸우며 커야 했고 그가 갖춘 실력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체념과 울분으로 지낸 세월 또한 많았다. 바로 이런 사람에게 해당되는 유명한 말이 있잖은가? 머리 좋은 놈은 노력하는 놈을 못 따라가고 노력하는 놈은 운 좋은 놈을 못 따라간다. 결국 베르만은 머리도 좋고 노력도 많이 했지만 그놈의 운빨이 더럽게도 따라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 베르만의 운빨없었던 음악인생을 한 번 살펴본다.
가혹한 운명의 장난-뛰어난 실력과 함께 주어진 예기치 않은 불운
어린 시절부터 비르투오소가 될 것을 미리 예약했던 베르만은 23세 때 모스크바 중앙음악원을 졸업하였고 구 소련이 자랑한 최고의 피아니스트인 유디나, 리히터 등에게서 피아노를 배우며 자신의 음악세계를 더욱더 공고히 할 수 있었다. 그 후 여러 곳에서 연주를 하던 베르만은 드디어 1959년. 그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린 획기적인 음반을 발표하게 된다. 베르만이 가장 즐겨 연주했고 세상을 경악에 빠뜨리게 한 바로 초절기교 연습곡(멜로디아 레이블)이 바로 그것이다.
바로 이 음반. 라자르 베르만의 명성을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획기적인 음반이 되겠다.
본격적으로 미국에 진출하게 된 것은 1970년대 후반, 그의 나이 46세때의 일이었다. 베르만의 초절기교 연습곡을 듣고 감탄한 미국의 에이전트에서 그의 미국공연을 알선하였고 1976년부터 1979년까지 4년에 걸친 시간동안 미국 전역을 순회하며 초절기교 연습곡을 비롯한 많은 곡을 무려 130여회에 걸쳐 연주회를 갖게 된다. 이때부터 베르만의 음악인생은 드디어 절정을 맞이했나 생각하였다. 그러나 신은 베르만에게 출중한 실력과 동시에 예기치 못한 불운 또한 함께 주었다. 4년간의 미국공연을 성공리에 마치고 소련으로 돌아오는 길에 소련에서 금서(禁書)인 책을 한 권, 그것도 아무런 생각없이 가지고 들어오다가 세관에게 걸려 또 한 번 좌절을 겪게 된다. 그 후로 무려 4년간 출국 금지 명령을 당한 것이다. 아~! 이런 쉬파~!
그 후에 베르만의 명성을 다시 확인시켜 주게 된 것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였다. 40이 넘어서야 겨우 이름을 알리나 했지만 소련당국의 강압에 죄다 훌훌 날려먹고 50대에는 그냥 이러저러 조금씩 연주나 하면서 보내고 그 후에 환갑이 된 1990년부터 겨우 다시금 연주여행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환갑이 된 베르만은 그 옛날 초절기교 연습곡을 번개치듯 연주하던 그 베르만이 아니었다. 그저 작은 무대에서 바이올리니스트인 아들 파벨 베르만의 반주나 해주는 정도였다. 그 후 이탈리아에 정착하였고 이몰라 음악원 교수로 학생들을 지도하는 것에 열중하며 만년을 조용히 보내다가 2005년 2월 6일 세상을 떠났다.
어찌보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불운 때문에 당연히 누렸어야 할 것들을 누리지 못한 사람인 것 같지만 그 이면을 보면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그는 술을 엄청 많이 마시고 다녔다. 때문에 자기 관리가 철저하지 못했고 술을 마시지 않은 날은 연주가 무척 훌륭했지만 술을 마신 날은 형편없었다고 한다. 자기관리가 철저하지 못했다는 점은 그의 체중변화와도 직접 관련이 있다. 두 번째의 출국금지 명령이 내려진 이후 그는 정신적인 슬럼프를 겪었는지 술을 입에 달고 사는 날이 많았고 때문에 체중이 엄청나게 불어 그의 연주에도 많은 악영향을 끼쳤다고 전해진다.
또한 이탈리아에 안착한 이후엔 젊은 시절의 회한, 분노, 뜨거운 열정을 모두 잃어버리고 편안함에 길들여졌다는 평가도 많았다. 때문에 그 정도의 엄청난 재능을 가진 피아니스트가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기량이 쇠할 리가 없는데 본연의 모습을 전혀 제대로 보이지 못했다는 평가도 많이 받았다.
베르만의 음악
쇼팽의 폴로네이즈 중 '영웅'을 연주하고 있는 라자르 베르만.
라자르 베르만을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레퍼토리는 두말 할 나위없이 리스트이다. 특히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을 연주하면서부터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서방세계에서도 열광하였으니 말이다. 초절기교 연습곡뿐만 아니라 순례의 행진 또한 베르만의 음반을 최고 명반으로 꼽는데 큰 이견이 없다.
베르만이 남긴 최고의 명연. 리스트의 순례의 해(Annees De Pelerinage)이다.
그 외에도 쇼팽의 연습곡,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특히 열정과 월광)를 비롯하여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아바도와 협연한 음반이 알아준다)을 비롯한 전주곡 모음 등도 빼놓을 수 없는 명연, 명반에 속한다.
베르만이 남긴 7CD 에디션 음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