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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트벵글러를 이야기 하기에 앞서-

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라는 커다란 이름을 알게 되면서 넓고 깊은 클래식 음악의 세계에 빠져 들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살았던 처절하고 치열했던 삶의 발자취를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그의 평가에 대한 많은 글을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는-정말 부족하디 부족한 글솜씨나마-그에 대한 나만의 글을 한 번쯤은 꼭 써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클래식 음악의 세계에 빠뜨려 이 지경까지 만들어 놓은 그에 대한 작은 보답(?)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클래식 음악을 좀 듣는다 하는 사람들, 그 중에서도 웹상에 글을 올리는 사람들은 거의 예외없이 푸르트벵글러에 대한 글을 올려놓은 것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평가는 찬양일변도라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들에 비해서 나는 푸르트벵글러라는 인물에 대해 나만의 시각으로 바라본 느낌을 써 볼 생각이다.

푸르트벵글러에 대해 가장 훌륭하게 소개한 두 개의 웹사이트
 
이영록의 음악페이지
바람구두 연방의 문화망명지

그리고 또 하나. 가장 많이 참조한 책: 푸르트벵글러(헤르베르트 하프너 著). 이 책을 읽고 난 후의 단순한 전사(transcription), 독후감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세상에 알려진 많은 유명인들은 그의 삶에 드리워진 빛과 어둠이 반드시 공존하기 마련이다. 단, 그들의 삶에서 밝은 빛과 어둠의 비율이 어느 정도이냐에 따라 후세의 사람들에 의해 그의 인생이 좋은 쪽인지 그렇지 아니한지 평가될 뿐이며 그 비율에 따라 그들을 존경하기도, 경멸하기도 한다.

그들과 같은 시대를 살아보지 아니한 사람들은 그에 대한 평가를 함부로 내릴 권리는 없을 것이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 사람이 어떤 선택을 했다면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없이 단편적인 결과만으로 그에 대한 평가를 내린다면 그 또한 매우 불공정한 처사라 아니할 수 없다.

20세기를 살았던 가장 위대한 지휘자로 서슴없이 손꼽히는 그 이름. 그 시대를 살았던, 혹은 그 이후의 세대들에게도 그 이름은 가장 위대한 지휘자임과 동시에 하나의 강박관념으로 자리 잡혀 있다. 바로 순수 아리아인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이유로 영광과 좌절, 존경과 질시를 함께 받아야 했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이다. 푸르트벵글러의 인생이야말로 그 시대를 살아가는 동안 중대한 선택의 기로 앞에서 고뇌하며 왜 그와 같은 선택을 했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지도록 하는 물음을 가질 수 밖에 없다고 할 것이다.

가장 위대한 지휘자.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지휘자. 보통 푸르트벵글러를 이야기할 때 습관적으로 따라붙는 수식어들이다. 그만큼 그는 20세기 초, 중반에 이르기까지 독일을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지휘자로 언제나 손꼽혔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음악계뿐만 아니라 전국민적 관심사였다. 그가 고뇌 끝에 내렸던 수많은 결정들은 한쪽에겐 환호성과 회심의 미소를, 또 다른 한쪽에겐 울분과 낙담을 불러 일으키며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을 쭉 들여다보면 과연 그가 존경만을 받을 사람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그의 여성편력과 특유의 시기, 질투는 도덕적으로 투철한 사람이 아님을 말해주고 성격 역시 무척이나 괴상스럽기 짝이 없었다. 결코 사교적이지 못한 성격의 소유자였고 타협을 무척 싫어했다. 타협을 싫어한다고 해서 굳건한 신념과 지조가 있는 행동을 보인 것도 아니었고 출세욕, 현실과의 타협이란 유혹 앞에선 한없이 약한 모습을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랬던 그가 이제 세상을 떠난지 반세기가 훌쩍 넘어버린 이 시점에서까지 언제나 존경 받고 위대한 지휘자로 남아야 하는지에 대해선 근본적인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앞서 전제한 바와 같이 동시대를 같이 살아보지 아니한 사람들에겐 그들의 인생을 함부로 이렇다 저렇다 평할 권리가 주어진 것은 아님은 분명하다. 또한 그의 인생에서 밝은 빛과 어두운 그림자의 비율이 어떤가에 따라서 그의 인생이 평가됨을 생각할 때 푸르트벵글러의 업적은 태양처럼 밝고 강한 빛이 오늘날까지도 찬란하게 뿜어져 나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 빛에 의해 감동을 받고 문화적 혜택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가 20세기를 살았던 가장 위대한 지휘자로 추앙할 것이며 두 번 다시 그와 같은 지휘자가 이 세상에 나타날 수 있을지에 대해선 무척 회의적이란 것 또한 분명하다.
강렬하고 영원한 빛만큼 그 그림자 또한 길었던 지휘자. 푸르트벵글러에 대한 길고도 긴 이야기를 시작해본다.

그는 음흉한 성격의 어린아이 같다-파울 요제프 괴벨스

12세의 푸르트벵글러. 오른쪽 입술 위에 있는 상처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푸르트벵글러는 대단히 폭발적이고 스스로의 화를 주체하기 힘든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이 상처 역시 어린 시절 그의 화를 다스리지 못해 생긴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카라얀을 이야기할 때 성공을 위해 신념을 버린 인간이란 혹평을 서슴지 않는다. 카라얀의 음악은 대단히 훌륭하지만 그의 인생은 결코 훌륭한 것만은 아니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푸르트벵글러는 어떤가? 푸르트벵글러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아니한 면이 많아서겠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어쩔 수 없이’, ‘고뇌에 찬’, 하지만 그는 위대한 지휘자였다는 식으로 귀결된다. 과연 그럴까?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19세기 독일의 최상류층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고고학자, 대학교수였고 어머니는 미술가였다. 집안 분위기는 대단히 엄격하면서 전인교육을 강조해서 건강한 육체와 정신, 예술과 교양을 모두 갖추는 교육을 시켰고 이에 빌헬름은 어린 시절부터 다방면의 지식을 습득하며 훗날 훌륭한 예술가가 될 수 있는 토양을 다져갔다.

운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스키를 대단히 잘, 즐겨 탔고 여러 운동에 소질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어릴 적부터 건강한 몸과 정신을 무척이나 강요한 아버지 덕에 운동과 산행을 좋아했다.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고 매우 왕성한 식욕을 자랑했다. 푸르트벵글러의 친구인 덴마크의 작곡가 파울 폰 클레나우의 아내인 안네 마리가 회고하길 ‘그의 벗은 몸은 내가 본 최고의 몸매였다’라고 한다.
어릴 적 그의 성격은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지만 거만하고 폭력성이 내재된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 좋은 환경에서 부족함이 없다 못해 넘치는 집안에서 다방면으로 교육을 받은 터라 북돋워지고 절대적으로 견고해진 비타협성이 노골적인 거만함으로 표출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대단히 자기방어적인 자의식이 강한 성격이 예술적 독창성을 만들어내는데 일조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그의 오른쪽 입술에 나있는 상처이다. 열살이 되기 전에 생긴 이 상처는 집안의 하녀가 식탁을 차리면서 책을 그만 읽으라고 하면서 강제로 책을 빼앗고 빼앗기는 과정에서 그 스스로 화를 이기지 못해 하녀를 뒤따라가다가 생긴 상처였다.

그의 불같은 성질에 관한 일화는 이 뿐만이 아니다. 수족처럼 부리던 그의 여비서인 가이스마르에게 재떨이를 집어던지기도 했고(다행히 가이스마르는 이를 피했다) 괴벨스에게 네 번이나 통화를 했으나 불통이 되자 주먹으로 유리창을 내리쳐서 손을 크게 다치기도 했다.

또한 특권을 가진 특별한 사람이라 생각했고 친구와 어울리기 어려운 성격이었다. 대단히 사색적이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다. 학교 규칙처럼 얽매이는 것을 체질적으로 싫어해 학교생활을 게을리했다. 결국 그는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가정교사를 두어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부분이야말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에게 있어서 어느 한쪽만의 스타일에 매몰되지 않고 가장 주관적인 음악-당시로선 대단히 파격적이고 이단으로 비춰질 수 있는-을 창조해낼 수 있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그의 성격은 상당 부분이 워낙 유명한 고고학자이기도 했고 무척 완고하고 엄격했던 아버지의 것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리고 그 아버지에 대한 열등감을 끝까지 떨쳐버리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아버지에게 느껴야 했던 심한 강박관념과 열등감은 누구에겐가 꼭 인정을 받아야겠다는 욕구로 이어졌고 이 욕구는 향후 푸르트벵글러의 인생에서 대단히 중요하게 작용하게 된다. 그가 가지고 있는 거만함이 내재된 인정욕은 고뇌와 갈등 속에 빠진 그에게 도덕, 인내를 초월하게 하도록 만들었다. 그 인정욕은 가깝게는 여성편력에서부터 시작된다. 푸르트벵글러는 여자관계가 무척 복잡했다. 그의 지휘가 여성들에겐 대단히 섹스어필하게 보인 것이다. 지나친 완벽성 추구에서 비롯되었지만 아직 성적으로 발산되지 못한 자기애의 욕망, 인정받고 싶은 전능의 환상이 그의 젊은 시절에 과도한 창작열에서 탈출구를 찾았다. 훗날 그는 당대 최고의 지휘자라는 지위를 맘껏 누리며 많은 돈을 벌었지만 정작 그의 수중엔 많은 돈이 있지 않았다. 여기저기 뿌려놓은 그의 씨앗, 그의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많은 돈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여자관계가 무척 복잡했다는 것은 도덕성의 결여, 금욕과는 매우 거리가 먼 것으로도 이야기할 수 있다. 푸르트벵글러는 여자관계가 결코 깨끗하고 도덕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대단히 사색적이고 내성적이어서 사람을 쉽게 사귈 수 있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여자관계에 있어서는 꽤 대범했다. 우선 여자들이 그를 내버려두질 않았다. 그의 주위엔 끊임없이 여자들이 구애를 하고 있었고 푸르트벵글러 역시 그녀들의 유혹에 강하진 못했다.

1916년엔 뮌헨에서 묵었던 여관집 딸인 율리에라는 여인과의 사이에 아들이 태어나 빌헬름이란 이름까지 주었으나 결국 율리에와는 결혼하지 않았다. 훗날 그녀는 미혼모로 평생을 살아야 했다. 뿐만 아니다. 아우구스테 벨라라는 여인과의 사이에서 딸 다그마르를 낳았고 작가 프리드리히 후흐의 동생인 엘리자베트 후흐와 10년 넘게 열애하며 세 번째 딸인 프리데리케를 낳았으나 결혼하진 않았다. 더구나 푸르트벵글러는 딸의 생일조차도 자주 잊어먹을 정도로 무책임한 아버지였다. 또한 엘제 허친슨이란 독일 여성-영국의 부호와 결혼한-과의 사이에서 이바라는 딸을 낳기도 했다. 영국인 가정에서 자란 이바는 자신이 영국인인줄만 알고 살았으나 훗날 순수 독일인이며 푸르트벵글러의 딸이란 사실을 알고 경악하게 된다. 게다가 치틀라 룬트라는 덴마크 여성과 결혼하였다. 룬트라는 만난지 5개월 밖에 안된 그와 결혼하기 위해 이혼을 했고 그를 열렬히 사랑했다. 아이를 못낳는 대신 그의 사생아들을 성심껏 보살폈으나 푸르트벵글러는 그녀의 가족을 만난 적도 없었다. 그리고 룬트라와는 훗날 결별하게 된다.

이와 같은 복잡하고도 까다로운 성격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말이 있다. 푸르트벵글러를 정치적인 목적으로 잘 이용해먹었던 나치의 선전부장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표현에 따르면 음악적 재능을 제외하곤 음흉한 어린아이 같다라고 하였다. 아마도 푸르트벵글러 본인은 무척 인정하기 싫겠지만 이 보다 더 정확한 표현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대단히 음흉하고 또한 비위를 맞추기 힘든 성격이긴 하지만 결국엔 먹을 것 하나를 던져주면 어린아이처럼 유순해지는, 그렇게 속이 훤히 다 보이는 순진한 성격이었다는 것이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 역사상 가장 뛰어난 지능의 미치광이, 대중 선동의 대명사. 히틀러의 가장 충실한 오른팔이었으며 나치의 실질적 최고 브레인. 당대의 수많은 지식인들은 그의 회유와 협박에 굴복하며 암울한 시절을 살아야 했다. 푸르트벵글러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다음편에서 계속...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_-;
Posted by sni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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