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324)
김소연 (59)
Classic Music Story (19)
Artist Story (46)
세상을 보는 눈 (122)
MLB Story (26)
KBO Story (13)
Fun Video (9)
Drama 보기 (9)
좋은 정보 (6)
In my mind (3)
그 시절의 pop story (9)

최근에 올라온 글

Total
Today
Yesterday
05-18 17:07
감사해요 사랑해요 잘했어요 함께해요

달력

« » 2024.5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펠릭스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 그래, 너 잘났다고 말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사람 중 하나. 풀네임은 Jakob Ludwig Felix Mendelssohn Bartholdy.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라는 식의 퀴즈들이 있다. 나도 흉내한 번 내보겠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의 아버지는 엄청난 재력가였다. 명망이 높은 은행가였고 그의 아버지의 아버지, 그러니까 할아버지는 유태교의 랍비(율법교사)였다. 그의 집안은 유태인 출신이며 유태교였으나 독일 사회에서 정착하기 위해 신교로 개종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 역시 아마추어 음악가임과 동시에 여러 나라의 문학을 전공한 학식과 교양이 풍부한 여성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집안이 겁나 부유한 집안이었다는 것. 그의 집안에 오케스트라가 있다면 말 다한 것 아닌가?


-어릴 적부터 돈 걱정 없이 산 것은 물론이거니와 부모의 사랑도 듬뿍 받으며 살았다. 천재적 재능에 대한 반대급부로 불행한 삶을 살아야 했던 수많은 작곡가들-모차르트, 베토벤 등 이루 헤아릴 수도 없지-과는 정반대로 여유롭다 못해 넘치는 재력가의 집 아들로 태어났고 화목한 집안에서 화목하게 살았다. 


어린 시절 그의 모습. 미소년의 끝장을 달리는 얼굴이다. 엄친아인 건 잘 알고 있지만서도 이건 해도 너무하는 거 아냐?



-돈이 많으니까 여행도 많이 다녔다. 영국, 이탈리아 등 유럽의 각지를 싸돌아 다니면서 견문을 넓힐 수 있었고 여기에서 느꼈던 무한감동을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통해 표출해냈다. 이탈리아를 여행한 후 괴테의 권유로 작곡하게 된 곡이 그 이름도 유명한 4번 교향곡인 '이탈리아'였다. 


-음악적 재능 또한 군계일학이었다. 그는 어떤 작품이든 고뇌하고 수정하며 창작의 고통을 느끼는 법이 거의 없었다. 중요한 예외라면 그의 대표작인 바이올린 협주곡 E minor 정도? 이 작품은 6년 걸려 작곡했다. 이런 재능을 가진 그를 두고 당대 최고의 작곡가 중의 하나였던 슈만은 모차르트의 환생이라고 극찬하였다.  


-모차르트, 베토벤도 그랬듯이 그 역시 어린 시절부터 될 성 부를 떡잎이었다. 소년의 천재적 재능은 17세에 그가 발표한 ‘한 여름 밤의 꿈’이 대 히트를 기록하며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그는 시적영감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어릴 적부터 문학작품을 탐독하길 좋아했고 특히 세익스피어의 작품을 무척 좋아했다. 세익스피어의 작품을 읽고 발표한 작품이 바로 ‘한 여름 밤의 꿈’이 되겠다.


-그는 12살의 나이에 독일문학을 대표하는 최고의 지성과 문학에 대한 토론을 나눌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최고의 지성은 누구? 바로 괴테였다. 72세의 괴테는 이 열 두 살 소년과 문학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나누는 것을 즐겼다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는 여행을 무척 즐겼는데(돈이 억수로 많았으니) 여행에서 느꼈던 바를 즉시 음악작품을 통해 드러낼 수 있었고 그 작품의 성격이 너무도 서정적이고 한 폭의 풍경화, 혹은 한 편의 시를 읽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그는 음악가였지만 그림도 잘 그렸다. 미술에 대한 재능 또한 무척 뛰어났다는 것.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지요? 아무리 엄친아라고 하지만 화가 나려고 한다. -_-+


그는 이렇게 그림을 그릴 정도로 재주도 많았다네. Hebrides와 Dunnollie Castle을 직접 스케치한 그림. 이보다 더 잘 그린, 뛰어난 그림들도 많이 있다.


-그의 부인은 당대 최고의 미인이며(음...-_-+) 집안도 겁나게 좋은 여자였다. 대부분의 음악가들은 가정생활이 행복하지 못하였던 것에 반해 그는 자상하고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슬하에 5명의 자식을 두었다. 


그의 부인이었던 Cécile Jeanrenaud. 프랑스 여자이다. 당대 최고의 미인으로 명성을 떨치던 여류 화가였다. 또한 그의 아버지는 저명한 루터교 목사였다. 그는 이 여자와의 사이에서 5명의 자식을 두고 매우 행복하게 살았다.


-그는 영국에서 영웅 대접을 받았다. 영국 여왕의 남편은 그의 음악이라면 뻑이 갈 정도였고 여왕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영국에 나타나면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연호하며 환장을 했다. 


-그는 당대를 주름잡는 작곡가이기도 했지만 지휘자로서의 명성 또한 대단했다. 아니, 음악사에 끼친 공로로는 지휘자로서의 그가 더 위대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흐 서거 100년이 넘은 후 그 이름도 유명한 ‘마태 수난곡’을 발굴, 공연하여 엄청난 히트를 기록하게 된다. 그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클래식 음악이란 장르는 옛날 작곡가의 곡을 발굴하여 새롭게 해석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등장하기 전까지 클래식 음악이란 당대의 작곡가들이 발표한 곡들만을 연주하고 인기를 얻는 식이었다. 진정한 의미의 ‘클래식(classic)'이란 사전적 의미, 즉, 옛 것을 발굴하여 새롭게 해석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감동을 주는 예술장르는 이 사람에서부터 정착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더 쓸 수도 있지만 여기까지만 하자.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물론 답은 펠릭스 멘델스존이다.


서양 중세 음악사에서 가장 아까운 요절을 한 사람으로 두 사람을 꼽는다. 바로 모차르트와 멘델스존이다. 하지만 이 두 사람 중 멘델스존의 요절이 더 아깝다고 해도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그 이유를 살펴볼까? 


모차르트는 수많은 다작을 하였고 그가 살았던 36년만큼만 더 살았더라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다작을 하였을 것이다. 오페라, 교향곡, 관현악곡, 실내악, 그리고 피아노 독주곡과 오케스트라를 구성하는 하나하나의 악기에 대한 협주곡과 소나타까지. 모차르트의 요절이 아까운 이유는 더 많은 다작을 할 수 있을 가능성, 그 이룰 수 없는 가정에 대한 아쉬움이다. 그가 더 많은 다작을 하였더라면 서양 중세 음악에 끼친 영향력이야 말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멘델스존의 요절에 대한 아쉬움은 모차르트의 것과 성질이 다르다. 모차르트는 그 자신, 한 사람의 천재적 능력에 대한 아쉬움으로 그치지만 멘델스존은 당시 독일음악계 전체에 끼친 영향력이 대단했던 인물이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멘델스존의 집은 엄청난 부잣집이었다. 멘델스존은 그 많은 돈을 풀어 어렵게 생활하는 음악가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라이프치히 음악원(Leipzig Conservatory)를 슈만과 함께 설립하였고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Leipzig Gewandhaus Orchestra)의 지휘자로 활동하며 전 유럽을 대표하는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발돋움 하게 한 것은 단연 멘델스존의 업적이 크다. 그리고 모차르트는 작곡가로서의 활동에만 국한되었을 뿐이지만 멘델스존은 지휘자로서의 업적이 어쩌면 작곡가로서의 것보다 더 크다고 할 정도로 옛날 작곡가들의 곡을 발굴하여 발표한 크나큰 업적을 남겼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마태수난곡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멘델스존이 20세 때 어느 푸줏간에서 누렇게 변색이 된 종이를 보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마태 수난곡의 악보였던 것. 청년 멘델스존의 각고의 노력 끝에 그 푸줏간 종이를 세상에 내놓지 않았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인류역사상 최고의 종교음악이라 칭송받는 그 음악은 고기와 피를 포장하는데 한 번 쓰이고 영원히 땅속에 묻혀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이만큼, 이~만큼 멘델스존이 독일 음악사에, 아니 중세 서양의 음악사에 끼친 영향과 공로는 너무도 크고 넓다. 이 멘델스존이 태어난 지 올해로 200년이 되는 해라고 한다.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이름을 널리 알리곤 있지만 그의 업적이 얼마나 대단한지에 대해선 잘 모를 수 있는 작곡가 멘델스존. 그가 더 살았더라면 정말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지대한 업적을 세웠을 것이다. 


펠릭스 멘델스존과 그의 누나인 페니 멘델스존. 네 살 차이의 이 남매는 사이도 퍽 좋았다. 누나의 피아노 실력은 동생 펠릭스도 인정할 정도. 누나는 동생에게 가장 훌륭한 음악의 조언자 역할을 했다. 근데 얘들. 남매라는 설명이 없으면 연인으로 봐도 좋을 것 같지 않아?


하지만 평생을 좋은 사람으로 살았던 그에게도 평생을 두고 괴롭혔던 골칫거리가 있었으니 바로 건강문제였다. 엄친아라고 불릴 정도로 어린 시절 부유한 집안에서 화목하게 살면서 자신이 꿈꾸었던 예술의 세계를 맘껏 펼치며 수많은 업적을 쌓을 수 있었던 멘델스존에게도 단 하나의 치명적인 결점이 바로 건강이었다. 과로에 의한 피로 누적으로 원래 건강이 좋지 않았던 멘델스존은 어릴 적부터 그토록 사이가 좋았던 누나가 갑작스레 세상을 뜨게 되자 그 역시 시름시름 병을 앓다가 6개월 후에 사망하고 만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38세. 하늘은 좋은 사람을 일찍 데려간다는 원망스런 절규를 다시금 느끼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멘델스존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를 대표하는 곡 중 하나인 바이올린 협주곡 E minor의 1악장 Allegro molto appassionato.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의 연주이다.

Posted by sniper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