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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쿠벨릭(Rafael Kubelik). 20세기 체코를 대표하는 최고의 지휘자. 뜨거운 가슴으로 체코를 사랑했고 자유로운 예술을 사랑했기에 그의 인생은 참으로 곡절도 많았다.


각 나라마다 그 나라를 대표하는 최고의 작곡가와 지휘자, 연주가가 있다. 독일엔 베토벤과 푸르트벵글러가 있었고 구 소련엔 차이코프스키와 에브게니 므라빈스키가 있었다. 한국엔 자랑스러운 이름 윤이상과 정명훈이 있다. 그리고 동구권의 나라 체코를 대표하는 작곡가와 지휘자는? 이란 질문에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은 드보르작과 쿠벨릭을 떠올릴 것이다. 그만큼 라파엘 쿠벨릭이란 지휘자는 20세기 체코 음악을 대표하는 명인 중의 명인이었고 등불이며 영혼과도 같은 존재였다. 20세기 체코 음악에서 라파엘 쿠벨릭을 빼면 이야기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그의 위치는 절대적이나 그가 살았던 삶의 행적이 한 곳에 제대로 정착하지 않고 망명생활을 너무 오랫동안 하였고 굵직한 자리를 맡아서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과소평가를 받기도 한다. 

쿠벨릭은 1914년, 체코 프라하 근교의 비호리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얀 쿠벨릭. 아들인 라파엘만큼이나 유명했고 한 시대를 풍미할 뻔 했으나 제대로 만개하진 못했던 초절정의 기교를 선보였던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음악적 소질을 선보였던 쿠벨릭은 14세 때 지휘자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바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주술과도 같은 지휘장면을 본 후였다. 

라파엘 쿠벨릭의 아버지인 얀 쿠벨릭. 당대를 주름잡았던 최고의 기교파 바이올리니스트로 각광받았다. 하지만 야사 하이페츠 등의 신진세력에 밀려 큰 빛을 본 것은 아니었다.


쿠벨릭이 정식 지휘자로 데뷔하게 된 것은 불과 20세 때였다. 16년의 기간 동안 바츨라프 탈리히에 의해 체코를 대표하는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성장해 있던 체코 필 하모닉의 상임지휘자가 된 것이다. 탈리히는 겨우 약관의 나이에 불과하지만 쿠벨릭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고 이에 자신이 오랜 세월 동안 공들였던 체코 필을 쿠벨릭에게 넘겨주었다. 체코에서 가장 인정받는 지휘자가 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22세였다. 그 후 1948년까지 12년 동안 2번, 9년간 체코 필의 상임을 맡으며 활약했다. 물론 그 당시까지의 쿠벨릭에겐 탄탄한 앞날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는 그의 길고 길었던 망명과 고난의 행군을 시작하기 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맛본 달콤한 시간이었다.


고집과 역마살-42년간의 망명생활


젊은 시절의 쿠벨릭. 1934년의 모습이다. 그러니까 그가 지휘자로서 처음 데뷔했을 당시가 되겠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그의 인생은 성공가도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승전국인 미국과 소련의 힘에 의해 전 세계는 양극화 되었다. 그리고 소련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유럽의 동구권 국가들은 오로지 힘의 논리 때문에 공산화가 되었다. 쿠벨릭의 조국인 체코도 마찬가지였다. 


쿠벨릭은 자신의 조국에 공산정부가 들어서고 인권을 탄압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바로 망명을 결심하였고 이후 전세계 곳곳을 떠돌아다니면서 떠돌이 생활을 하기 시작한다. 처음 정착한 곳은 영국이었다. 이후 스위스로 다시 망명하여 스위스 국적을 취득한 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아르투르 로진스키의 뒤를 이어 CSO(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을 맡아 1950년부터 1953년까지 그 곳에 머물렀다. 하지만 쿠벨릭은 어느 한 곳에 제대로 머물러 있지 않도록 역마살을 타고 났던 것 같다. 이 곳에서도 음악적인 견해 때문에(레퍼토리가 협소하다는 비난) 곧바로 자리를 사임하고 또 다시 정처없는 떠돌이 생활을 시작한다. 


3년간의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유럽으로 돌아와 코벤트가든 왕립 오페라 극장의 감독이 되어 오페라에 많은 열정을 쏟아 부었지만 이 또한 수월하지 않았다. 이 기간은 1958년까지 그나마 오래 있었다. 그 후 1961년에 쿠벨릭으로선 제2의 전성기를 맞을 수 있는 중요한 자리를 잡게 된다. 독일 출신의 대지휘자 오이겐 요훔의 뒤를 이어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의 수석 상임의 자리를 맡게 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쿠벨릭은 그 어느 때보다 왕성한 음악활동을 펼치며 수많은 레코딩과 연주여행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었다. 이 때의 기간은 무려 11년. 그의 인생에서 이토록 오랫동안 상임이란 타이틀을 내걸었던 적은 이 당시를 제외하곤 없었다.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의 수석 상임을 사임한 후엔 여러 곳을 전전하며 객원지휘자만을 맡았을 뿐 상임이랄지 책임 있는 자리를 더 이상 맡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떠돌이 생활만을 하였을 뿐이다. 


42년의 망명생활 끝에 쿠벨릭이 다시 돌아간 곳은 결국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조국 체코였다. 지난 젊은 시절에 조국이 공산화 되는 것을 볼 수 없다며 떠난지 어언 42년이 지난 후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어 다시금 조국의 품에 안긴 것이다. 1990년 체코의 민주화가 이루어진 후 쿠벨릭은 체코에 돌아와 그 옛날 자신을 진정한 지휘자로 만들어준 체코 필의 총감독을 다시 맡아 생의 마지막을 불태우며 조국의 음악발전에 힘썼다. 그렇게 한 평생 동안 곡절 많은 삶을 살았던 쿠벨릭은 전 세계 음악팬들의 애도 속에 1996년, 82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그는 평생토록 진정 자유로운 예술혼을 추구하였고 이에 정치적 망명도 불사하였다. 이념으로 엇갈려 거칠기만 했던 역사의 풍랑 속에 자신을 내던져 여기저기 부딪치며 살아 왔지만 그는 자신만의 예술혼을 지키고자 처절하게 노력하였고 또한 자신의 조국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뜨거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Posted by sni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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