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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디오 아바도-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지휘자

진부하기도 하고 다른 많은 사람들이 쓰는 표현은 웬만하면 피하고 싶지만 적어도 클라우디오 아바도라는 지휘자에 대해선 이 표현 외엔 다른 적절한 표현이 없을 듯 하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지휘자’

가장 짧고도 강렬한 이 표현이 함축하는 의미는 다양하고도 크다. 아바도가 걸어온 음악인생, 지휘자로서의 경력, 그리고 업적, 녹음한 음반의 수, 그리고 평단과 음악애호가들의 평가, 게다가 그가 구축하고 있는 인적 인프라까지의 팩터를 모두 고려하여 점수를 매겼을 때 현존하는 지휘자 중 아바도를 능가하는 이는 단연코 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탈리아 밀라노 출신의 대지휘자 아바도는 바로 그런 사람이다. 

끝내주는 집안에서 받은 끝내주는 음악교육

젊은 시절의 아바도. 전형적인 이태리 미남의 모습. 얼굴 잘났지, 집안 끝내주지, 젊은 시절부터 출세했지. 이 사람 뭐하나 부러울 게 없는 사람이다.


아바도는 1933년 이탈리아의 밀라노 출신이다. 이 유서깊은 오페라와 음악의 도시에서 아바도의 집안은 음악인으로서는 최고의 명문 중의 명문집안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작곡가, 바이올리니스트로 베르디 음악원의 원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아바도의 형은 피아노, 작곡을 했고 파르마 음악원의 원장을 역임했다. 이처럼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난 아바도는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레 음악을 접하며 배울 수 있었다. 처음엔 그의 아버지에게서 개인교습을 받았고 베르디 음악원에 들어가 피아노와 작곡을 배운다. 하지만 이때부터 아바도의 꿈은 연주자가 아니라 작곡가의 길이었다. 독학으로 지휘법을 연습하였고 음악원 시절에 안토니오 보토에게 지휘를 배우기도 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접할 수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고 착실히 엘리트 교육을 받아가던 젊은 아바도. 이제 20세가 넘어선 또 하나의 대가인 한스 스바로프스키(Hans Swarowsky)에게서 지휘를 배우며(이때 아바도와 동문수학한 또 하나의 지휘자가 주빈 메타이다) 본격적으로 지휘자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첫 번째 관문은 쿠세비츠키 지휘자 콩쿨에서의 우승이었다. 

쿠세비츠키 콩쿨에서 우승한 후 아바도의 명성은 조금씩 멀리 퍼져 나갔다. 우선 1960년에 열린 스칼라 극장에서 데뷔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고 여러 오페라 하우스와 계약을 맺으며 오페라, 콘서트 지휘자로 활약하기 시작하였다. 

쿠세비츠키 콩쿨에서의 우승 이후의 행보가 아바도의 지휘자로서의 첫발을 내딛게 한 것이라면 그의 나이 서른에 맞이한 또 하나의 콩쿨에서의 우승은 그의 명성을 세계적으로 알리게 한 일대 사건 중의 하나였다. 바로 1963년에 열린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Dimitri Mitropoulos) 지휘자 콩쿨에서의 우승이 그것이다. 그리고 2년 후인 1965년엔 빈 필을 지휘하며 짤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화려하게 데뷔하게 되는데 이때 그가 택한 레퍼토리는 그의 평생의 장기 중 하나인 말러 2번, 부활이었다. 

짤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그가 얻은 것은 명성뿐만이 아니었다. 바로 이 때를 계기로 하여 카라얀에게 인정을 받게 되고 카라얀의 후원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 1965년에 짤츠부르크 페스티벌을 통해 화려한 데뷔를 한 후 그 이듬해에 베를린 필을 처음으로 지휘하게 되는 영광을 맞게 된다. 그리고 훗날 이들의 인연은 묘하게도 얽혀 베를린 필의 장기 집권을 했던 카라얀의 후임을 아바도가 맡게 되어 새로운 황제의 자리에 등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1967년부터는 빈에서 데뷔,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최고의 오페라 지휘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영광 중의 영광인 스칼라 극장의 상임지휘자의 자리에 오르게 되어 그의 앞길은 거칠 것이 없는 탄탄대로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성공가도는 1970년대를 이어 1980년대까지 이어지게 된다. 

새로운 황제의 등극

샤방한 시절의 아바도와 아르헤리치. 몇 번씩이나 결혼을 한 아르헤리치에게 왜 아바도는 남자로 보이지 않았나 모르겠다. 두 사람은 음악의 훌륭한 파트너로 할배, 할매가 된 지금까지 반세기를 넘게 교류하고 있다.


아바도는 무척 빠른 나이에 출세길에 접어 들었다. 그가 갖추고 있는 뛰어난 음악성, 그리고 좌중을 사로잡는 카리스마, 수려한 외모와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뛰어난 집안 배경까지 모든 것을 넘치도록 갖춘 운이 억세게 좋은 사나이였다. 1960년대부터 젊은 나이에 이른 출세의 길에 접어들었고 1970, 1980년대까지 수놓았던 그의 이력은 너무도 화려하다. 대충의 이력만 뽑아보아도 스칼라 극장 음악감독,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LSO)의 상임,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CSO)의 객원, 빈 국립 오페라의 음악감독, 그리고 말러 협회로부터 메달 수여 등등이다. 이토록 끝 간데없이 화려한 아바도의 명성을 다시금 확인시켜준, 세상을 놀라게 한 또 하나의 사건이 등장하게 된다. 

1989년 여름. 전 세계 클래식 음악계의 황제로 장기집권 한 카라얀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 카라얀이 세상을 떠난 뒤 그토록 오랜 세월에 걸쳐 카라얀의 수족처럼 움직였던 베를린 필이 과연 누구를 새로운 수장으로 맞이할 것인지, 그리고 그 뉴페이스는 과연 베를린 필에서 새롭게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할 수 있을지의 문제가 전 세계 음악팬들의 초미의 관심사로 대두되었다. 후보군은 대략 8인으로 압축되었다. 로린 마젤, 제임스 레바인, 리카르도 무티, 다니엘 바렌보임, 베르나르드 하이팅크, 주빈 메타, 카를로스 클라이버, 그리고 아바도.

이 중에서 실력이나 지명도로만 따지자면 클라이버가 가장 우선순위로 올라갈 수 있었으나 그의 자유분방한 성격상 베를린 필을 맡을 리가 만무했고 다른 인물 중 누가 있을까 보았는데 어찌 보면 지극히 의외의 인사인 아바도가 선출되었다. 이에 아바도와 클라이버를 제외한 다른 6인의 지휘자들은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아바도가 의외란 점은 일단 다른 지휘자들에 비해 나이가 젊었기 때문이며 비록 아바도가 젊은 시절부터 화려한 경력을 쌓아왔다곤 하지만 어느 특정 악단의 상임지휘자로서의 경력이 부족했고 그 외의 후보로 언급된 인물들 역시 아바도에 비해 뛰어났으면 뛰어났지 결코 부족하다고 할만한 지휘자들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베를린 필의 새로운 수장으로 선출된 것은 사실 아바도 본인이 가장 놀랄만한 소식이었다. 그것도 단원들의 직접 투표에 의해 최초로 선출된 베를린 필의 5번째 상임지휘자라는 상징적인 자리. 아바도 본인 또한 놀라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엄청난 사건임이 분명했다. 

여기서 잠깐 베를린 필이란 곳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본다. 베를린 필은 1882년 5월에 창설되었다. 정관에는 단원들의 의견을 최우선으로 하고 상임지휘자를 선출할 때에도 단원들의 비밀투표를 원칙으로 한다고 되어 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정관에 적혀있는 글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원칙에 불과했다. 단원들과 지휘자간의 대립이나 갈등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지휘자의 절대권력마저 위협할 정도의 힘을 발휘하는 것은 애초에 봉쇄된 것. 베를린 필의 상임자리는 말 그대로 죽을 때까지, 죽기 전까지 꼭 끌어안고 있어야 할 가장 탐스러운 권좌에 다름 아니었다. 이 곳의 상임 지휘자는 2009년 현재까지 모두 6명. 한스 폰 뵐로-아르투르 니키쉬-빌헬름 푸르트벵글러-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그리고 클라우디오 아바도-사이먼 래틀이 전부이다. 무려 130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이 조직이 얼마나 지휘자의 1인 독재와 권위에 경직되어 있는지를 알려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일찍이 칼 뵘도 이 부분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베를린 필과 빈 필을 모두 경험하였던 그는 두 오케스트라를 비교한 적이 있었는데 빈 필의 단원들은 빈 오페라극장의 단원들 중에서 선출하는, 그 지방 출신의 사람들이 대다수이며 그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사투리 등을 쓰며 새로운 지휘자가 왔을 경우 길들이기를 시작한다. 상임지휘자도 따로 있지 않다. 대단히 민주적이며 단원들 하나하나의 자부심은 하늘을 찌를 정도이다. 만일 새로 들어온 지휘자가 단원들보다 실력이 덜 하거나, 음악적으로 조금의 헛점이라도 발견되었을 경우 바로 지적하며 뒤에서 수근거리며 지휘자를 올려 놓고 흔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베를린 필의 경우는 다르다. 베를린 필의 단원들은 매우 엄격하고 보수적이며 또한 매우 예의 바르기 때문에 지휘자에 대해 절대 복종을 원칙으로 한다. 어지간히 잘못된 경우가 아니라면 지휘자에 대해 직접 쫑코를 놓거나 하는 식의 행위는 하지 않는다. 

어쨌든 독일 출신도 아닌 한 이탈리아 출신의 젊은 지휘자가 세계 최고를 상징하는 베를린 필에, 그것도 무려 단원들의 직접 투표를 통해 새로운 황제로 등극하게 된 이 엄청난 사건. 전 세계 음악팬들의 관심이 집중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바도는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로 취임하여 카라얀 시대의 유물인 독재적 지휘자의 모습에서 탈피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상임으로 선출될 그 당시에 베를린 필과 함께 브람스 교향곡을 녹음하고 있었고 카라얀 시대의 경직된 분위기와 독재적인 카리스마에 질릴 대로 질린 베를린 필의 단원들은 대단히 민주적이고 나긋나긋한 성격의 아바도를 좋아했었다. 

단원들은 민주적이고 수평적 카리스마를 가진 새로운 지휘자를 원했던 것. 이와 같은 단원들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아바도는 단원들과의 민주적인 의사소통을 최우선으로 하였고 그 일환으로 그의 이름을 부를 땐 ‘클라우디오’라고 부르길 요구하였다. 지휘자와 단원들이 대등한 관계로 서로 음악에 대한 토론을 하는 분위기. 아바도 이전의 베를린 필에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음이 분명했다. 

아바도가 처음부터 베를린 필이라는 어려운 자리에서 손쉽게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아니었다. 베를린 시와의 갈등, 그리고 프로그램 선정 등에서 단원들과의 갈등도 있었지만 아바도는 이 모든 것을 원만히 해결하며 카라얀 이후의 베를린 필을 다시금 세계 최고의 악단임을 확인시켜주는데 성공했다. 

젊은 시절부터 좋은 환경에서 성장하여 거칠 것이 없는 음악인생을 펼쳐왔던 클라우디오 아바도. 하지만 그처럼 팔자가 좋은 사람에게도 불운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10여 년의 베를린 필의 수장 자리를 맡으며 승승장구를 거듭했지만 그는 일생일대의 가장 위험한 고비를 처음으로 맡게 된다. 바로 위암선고였다. 

불가능.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대수술을 받은 후 이렇게 폭싹 늙어버린 아바도. 완전 할배가 되었다. 그래도 그의 모습을 이렇게 계속 볼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고 감사해야 할 일이다.


아바도는 카라얀 이후 5번째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를 맡을 때 1998년까지의 계약을 원칙으로 하되 2002년까지의 연장이 가능하다는 조건으로 계약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1990년대 초반에 아바도는 베를린 필 외에 빈 필의 지휘도 맡고 있었고, 유럽 체임버 오케스트라, 구스타프 말러 청소년 관현악단, 유럽 공동체 청소년 관현악단을 직접 조직, 지휘를 맡는 등 일 욕심이 끝없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일에 대한 욕심이 많은 사람들 중엔 자신의 끓어 넘치는 에너지를 해소할 길이 없어 그저 욕심만 많고 정신이 산만하여 결국 그 열매는 초라한 사람들이 많은데 반해 아바도는 그렇지 않았다. 이 모든 것들을 다 원만하게 해결하며 ‘역시 아바도’라는 찬사를 아낌없이 받았다. 특히 청소년 관현악단에서 청소년들을 지휘하는 일에 있어서 무척 열정적이었는데 여기에서 그는 한 푼의 돈도 받지 않고 무보수로, 오로지 정열만으로 청소년들을 지도하여 더더욱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사람은 일하는 기계가 아닌 법.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를 두 개씩이나 거느리고 게다가 그 곳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갈등을 이렇게 저렇게 봉합하며 힘든 세월을 살아온 아바도는 결국 그의 몸에 탈이 나고야 만다. 바로 위암 판정을 받게 된 것이다. 그것도 매우 심각한 수준의 위암이었다. 2000년 여름 경에 그토록 자신의 몸을 쉬지 않는 기계, 로봇처럼 취급하며 마구 다루었던 아바도는 위암으로 쓰러지게 되고 악성종양이 퍼지게 된 위장의 대부분을 잘라내는 대수술을 받게 된다. 안 그래도 벌여 놓은 일이 많은 이 바쁜 사람이 이처럼 대수술을 받게 되다니.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지만 다행히도 수술은 성공리에 마무리 되었고 그 해 겨울에 다시금 그를 사랑하는 수많은 팬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무척이나 야위고 안쓰러운 모습으로. 하지만 그는 다시금 음악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그에게 있어 음악은 만병을 치료할 수 있는 최고의 치료제이며 그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의사임을 그는 믿었다. 

위암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마저 음악에 대한 사랑과 열정으로 극복한 클라우디오 아바도. 불가능.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스포츠 용품의 카피는 20세기를 넘어 21세기 현재 시점에서 현존하는 최고의 지휘자라는 극찬이 전혀 아깝지 않은 그에 대한 헌사가 아닐까?

아바도와 루체른 페스티벌

루체른 페스티벌을 지휘하고 있는 클라우디오 아바도. 드뷔시의 바다(La Mer)의 제3곡 ‘바람과 바다의 대화(Dialogue du vent et de la mer)’를 지휘하고 있다. 자세히 보면 단원들 중 아주 유명한 사람이 있다. 양볼때기에 바람 이빠이 넣고 클라리넷 부는 저 여인.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자비넷 마이어(Sabine Meyer)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아바도는 일욕심이 무척이나 많고 그 많은 욕심을 자신의 재능과 노력으로 모두 척척 해결하는 대단한 사람이다. 그러나 2000년에 위암 수술이라는 대수술을 받고 나선 될 수 있으면 언론에 노출하는 것을 피하고 연주회 스케줄도 적게 잡으면서 건강을 추슬렀다. 겨울엔 따뜻한 남미에 가서 청소년들을 위한 음악감독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등 대외활동을 자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타고난 천성은 어쩔 수 없는 법. 그는 아픈 노구의 몸을 이끌고 또 한 번 대단한 일을 해내고야 만다. 2003년에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창립, 매년 이 곳에서 말러 교향곡을 위주로 한 여러 프로그램의 지휘를 맡고 있으며 루체른 페스티벌을 세계 최고의 음악축제로 만들고야 만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2007년 여름에 루체른에 갈 일이 있었다. 스위스. 그곳은 정녕 내가 꿈속에서만 그릴 수 있었던 꿈과 사랑의 유토피아, 그 자체였다. 고개를 돌리면 그림엽서 같은 천하절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고 게다가 헐리우드 영화 배우들과 전혀 구별이 가지 않을 만큼 겁나게 예쁜 여인들은 왜 그렇게도 많은지. 아! 이 곳이야말로 내가 한 번쯤은 살아야 할 곳이구나. 난 진정 스위스에 홀딱 반해버렸다. 그런데 그 루체른에 가게 된 이유가 바로 그 즈음에 한창 진행 중이던 루체른 페스티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난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모습을 실제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소년소녀처럼 떨리는 마음을 진정할 수 없었는데. 

하지만 결국 그 스케줄이 빠방나버렸다. 우쒸~ 아바도가 지휘하는 말러의 교향곡을 내 눈앞에서 실제로 볼 수 있다는 것. 그것도 루체른 페스티벌에서. 내 일생일대의 두 번 다시 올 수 없는 그 타이밍을 난 너무도 허망하게 놓쳐 버린 것이었다. 아…ㅠ.ㅠ

아! 씨바. 나도 여길 갈 수 있었단 말야 ㅠ.ㅠ


클라우디오 아바도. 그가 앞으로 몇 년 동안, 얼마나 살게 될지 모른다. 지금의 모습만 봐도 너무나 수척해졌고 너무 안쓰러울 정도로 아파 보이는데 그가 언제까지 건강한 웃음을 보이며 살게 될진 모른다.

카를로스 클라이버,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엘리자베스 슈바르츠코프,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쥬세페 디 스테파뇨. 20세기를 살았던 거장 중의 거장들 중 21세기 들어 세상을 떠난 이들이다. 
진정한 거장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하늘의 부름을 받고 세상과 작별을 하고 있는, 해야 하는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인생의 가장 큰 위기를 넘긴 아바도(그리고 한 명 더해서 야노스 슈타커)가 앞으로 몇 년을 더 건강하게 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가 떠나간다면, 그 마저 떠나가게 된다면. 

20세기를 빛낸 마에스트로의 시대는 이것으로 종말을 고했노라는 언론의 기사가 뜰 것이다. 
Posted by sni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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