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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웰의 외계인을 연상시키는 얼굴의 지휘자 이고르 마르케비치(Igor Markevich). 그는 천재작곡가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지휘자로 평생을 살았다.


지휘자가 된 천재 작곡가

클래식 음악의 대가들이 자신의 음악세계를 펼치는 일반적인 패턴을 보면 연주자(특히 피아노)-관현악 지휘자-오페라 지휘자-작곡가의 순으로 밟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너무 많은 예가 있어서 하나하나 들기도 벅차겠지만 몇몇 예를 들어보면 브루노 발터 역시 대 지휘자 이전엔 명 피아니스트이기도 했고 카라얀도 첫 출발은 피아니스트였다. 푸르트벵글러는 자신을 지휘자가 아닌 작곡가라고 생각다. 레너드 번스타인 역시 피아니스트, 지휘자임과 동시에 작곡가이기도 했다. 20세기 바이올리니스트의 전설 다비드 오이스트라흐는 어떤가.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역시 지휘자로서의 활동을 겸해 활동하였다. 그의 소원은 오페라 지휘자가 되는 것이었는데 결국 오페라 무대를 밟아보진 못하고 암스테르담의 한 호텔에서 안타깝게 급서하고 말았다.
이처럼 연주자보다는 지휘자, 지휘자보다는 작곡가가 되는 것이 자신의 음악세계를 맘껏 펼칠 수 있는 운신의 폭이 넓어진다는 것은 분명한 듯하다. 다른 사람이 작곡해놓은 작품을 연주하는 것 보다는 자신이 직접 작곡한 곡을 연주하고 연주되는 것을 듣는 것이 음악가들의 이상향일 것이다.

20세기를 살았던 대 지휘자 중의 한 명이며 천재 작곡가라는 평가를 함께 받았던 이고르 마르케비치. 그는 연주자-지휘자-작곡가로 향하는 일반적인 패턴에서 약간 벗어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작곡가로서 더욱 큰 명성을 쌓아갈 수 있었는데 반해 지휘자로서의 삶에 더 큰 매력을 느끼고 지휘자로서 활동한 인물이었다.

이고르 마르케비치는 1912년 우크라이나의 키에프 태생이다. 그의 아버지 보리스 마르케비치는 피아니스트였고 그의 집안은 대대로 귀족집안이었다. 이고르는 러시아 태생이지만 그의 부모가 볼세비치 혁명의 난리를 피해 이고르를 데리고 1914년에 스위스로 망명을 했기에 그는 러시아인보다는 스위스에서 성장했고 음악적 재능을 더욱 키우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가 음악공부를 하게 된다. 바로 여기에서 그는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이며 그의 음악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스승인 알프레도 코르토를 만나게 된다. 이때 코르토는 마르케비치의 음악적 능력, 특히 작곡능력을 높이 샀고 마르케비치는 코르토에게서 피아노를 배우게 된다. 마르케비치에게 또 한 명의 큰 스승이 있다면 나디아 블랑제이다. 블랑제는 작곡가와 교육자로서 그 명성을 크게 떨친 인물인데 너무도 유명한 디누 리파티의 스승이기도 하고 작곡가보다는 교육자로서의 활동에 더욱 심혈을 기울여 수많은 제자를 양성해낸 전설적인 인물이다. 마르케비치는 바로 이 블랑제에게 화성학, 작곡을 배우며 천재 작곡가로서의 등장을 예고하게 된다. 이때 그의 나이 겨우 14세. 하지만 당대의 실력자였던 코르토는 마르케비치의 발표회를 열어줄 정도로 그에게 각별한 애정을 쏟아 부었고 그만큼 마르케비치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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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코르토(Alfred Cortot). 20세기 초반 프랑스 피아니스트의 대부격인 인물. 20세기 초반엔 '쇼팽'하면 코르토였다. 훗날 바그너에 심취해 지휘자에 더 전념하게 된다.


피아노, 작곡을 함께 공부하며 모두 두각을 나타냈던 마르케비치. 하지만 지휘에도 발군이었다. 1930년, 18세의 나이에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지휘자로 데뷔하게 되는데 자신이 작곡한 작품을 지휘하였고 지휘자로서도 크게 인정받게 된다. 그러나 이 당시의 마르케비치는 지휘자보다는 작곡가로서의 능력을 더 인정받았고 마르케비치 자신도 작곡가로서의 역할에 더 큰 비중을 두었던 것이 사실이다.
1930년대에 발표한 그의 곡들은 이카로스의 비상(L'Envol d'Icare), 갤럽(Galop), 오케스트라를 위한 찬가(Hymnes for orchestra)를 비롯하여 16곡이나 된다. 하지만 이들 중 현재까지 활발하게 연주되고 있는 곡은 없고 마르케비치 역시 2차대전이 발발한 후에는 작곡가보다는 지휘자로서의 활동에 큰 비중을 두었다.

지휘자로서의 활동에 중점을 두고 크게 명성을 날리게 된 것은 2차대전이 발발한 후부터였다. 당시 마르케비치는 이탈리아의 피렌체로 망명을 하였고 여기에서부터 그가 당대의 뛰어난 지휘자 중의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피렌체에서 그는 반 파시즘의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하기도 하였고 종전 후엔 이탈리아 국적을 취득하였다. 

마르케비치가 종전 후부터 지휘자로서 더욱 두각을 나타내고 지휘자로서의 인생을 걷게 되자 그의 스승이었던 블랑제는 큰 아쉬움을 토로했다고 한다. 천재작곡가가 될 길을 포기하고 지휘자가 되길 원한다고. 마르케비치가 작곡가로서의 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는 일례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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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디아 블랑제(Nadia Boulanger). 수많은 작곡가를 양성한 훌륭한 작곡가들의 스승. 그 역시 작곡가였으나 교육자로서의 인생에 더욱 매진하였다.


마르케비치가 작곡활동을 포기하고 지휘자로 전환한 것에는 건강상의 이유도 있었다. 건강이 크게 좋지 않았으나 회복된 후에 너무 힘든 작곡활동을 그만 두기로 맘먹고 지휘자로 매진하기로 맘먹었다.
본격적인 지휘자로서의 활동을 시작한 후 마르케비치는 미국과 유렵을 넘나들며 활발한 활동을 하며 수많은 명반을 만들어냈다. 1955년엔 보스턴 관현악단(BSO)를 맡았고 스톡홀름 교향악단의 상임, 몬트리올 교향악단의 음악감독을 역임하였다. 겨우 두 살 때 떠났으나 그에겐 조국인 소련의 국립교향악단을 맡기도 하였다.

교육자로서의 명성 또한 대단했다. 세계의 유수한 지휘자 중 그의 교육을 받은 이들도 상당하다.
작곡가, 피아니스트, 지휘자로서의 출중한 능력을 모두 인정받았던 천재 음악가. 하지만 지휘자와 교육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며 많은 명연주, 명반과 업적을 쌓았던 이고르 마르케비치는 1983년 71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급서하였다. 80, 90이 훌쩍 넘어서까지 장수하는 다른 많은 음악가들의 수명에 비하면 짧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마르케비치의 음악-가려져 있기에 아쉽기만 한 명연주들

바그너의 '발퀴레의 기행' 서곡을 연주하고 있는 마르케비치. 지옥의 묵시록, 발키리 등에 삽입된 너무 유명한 곡이다. 자신을 내세우는 것을 싫어하는 지휘자여서인지 마르케비치의 얼굴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카라얀은 짧은 동영상 중 자기 얼굴이 거의 반 이상은 나오는데.

앞서 수 차례 언급한 것처럼 이고르 마르케비치라는 음악가는 작곡가, 피아니스트, 그리고 지휘자의 세가지를 모두 훌륭하게 해낸 대단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업적 중 가장 빛나는 부분은 단연 지휘자로서의 활동이었기에 지휘자로서 마르케비치에 대해 알아본다.

우선 나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면 내가 마르케비치라는 지휘자에 대해 맨 처음으로 이름을 접하게 된 동기는 클라라 하스킬과 협연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 24번의 음반부터였다. 즉, 하스킬이란 피아니스트를 알게 된 이후 마르케비치를 알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그만큼 마르케비치는 많은 음반을 남기려 하지 않았고 또한 자신을 내세우는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지휘하는 모습을 보면 대단히 정확하고 정밀하지만 큰 동작 이랄지 쇼맨십이 비춰지는 모습을 볼 수 없다. 이 때문에 마르케비치라는 지휘자가 있는 줄은 알지만 그의 음악에 대해 제대로 접할 기회도 없이 모르고 지나칠 수 있는데 마르케비치가 남긴 명반을 제대로 한 번이라도 들어보면 그가 얼마나 대단한 지휘자였는지, 왜 그가 천재 중의 천재 음악가로 그토록 칭송을 받았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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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스킬과 함께 찍은 사진. 맨 왼쪽이 마르케비치, 그 옆의 할매가 하스킬, 훌러덩 아저씨는 배우 율 부리너, 그리고 살집있는 아저씨는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


마르케비치는 러시아에서 태어났으나 스위스로 망명을 하고 프랑스에서 음악을 배운 뒤 이탈리아에서 대가의 반열에 오른 상당히 특이한 케이스를 지닌 지휘자이다. 이는 그의 음악 스타일이 국적에 따라 어느 한쪽에 매몰되지 않고 매우 유동적이며 다양한 해석을 들려주고 있음을 설명하는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이는 그가 다루었던 레퍼토리에서도 알 수 있다. 하이든의 교향곡부터 20세기 작곡가들의 현대음악까지 매우 폭넓은 곡을 다루었으며 어느 하나의 스타일에 매몰되지 않는 명쾌한 해석을 들려준다.

마르케비치는 종교음악과 오페라, 성악 쪽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대신 교향곡, 관현악곡, 협주곡 등에 있어서 매우 탁월한 해석을 들려주고 있는데 그가 남긴 음악들의 특징은 대단히 정밀하고 직관적이며 곡의 핵심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음반 녹음을 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다. 때문에 많은 음반이 남아있진 않지만 그가 남긴 음반들이 받는 평가는 하나같이 매우 높다.

마르케비치가 남긴 음반 중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음반은 우선 환상교향곡과 파우스트의 겁별, 이탈리아의 헤롤드 등 베를리오즈의 작품을 들 수 있다. 환상교향곡이야 유명한 음반이 워낙 많고 이것저것 다 들어본 사람들도 많이 있겠지만 마르케비치의 1961년 DG 음반도 꼭 한 번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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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브람스, 바그너 등 독일작곡가의 해석에도 좋은 평가를 받는다. 특히 베토벤 교향곡 3번, 6번, 브람스 교향곡 4번이 무척 훌륭하다. 이들 음반 역시 마르케비치 외에도 동곡을 대표하는 수많은 명반이 있기에 마르케비치의 음반까지 손이 가지 않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한 번은 꼭 들어봐야 하는 명반임은 틀림없음을 이야기하고 싶다.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과 관현악곡 역시 그렇다.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하면 떠오르는 몇몇 인물-므라빈스키, 스베틀라노프, 콘드라쉰, 카라얀-등이 있기에 마르케비치는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도 약간 두찌로 밀려나는 경향이 있긴 하다. 그러나 이 역시 앞에서 언급한 것과 똑 같은 이야길 반복하고 싶다. 그냥 들어봐라. 특히나 마르케비치의 차이코프스키 4번과 6번은 옛날부터 유명한 명반 중의 하나였다. 그의 직선적이고 강렬한 해석은 소련출신의 지휘자들의 명반들과 비교해서 전혀 그 위엄이 떨어지지 않는다. 특히 차이코프스키의 만프레드 서곡, 리미니의 프란체스카는 대단히 훌륭한 명연으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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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케비치의 지휘자로서의 업적을 가장 빛나게 하는 부분은 그의 현대음악 해석능력이다. 특히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앙세르메, 몽퇴, 불레즈, 살로넨 등의 뛰어난 지휘자들의 뛰어난 음반이 많지만 마르케비치의 음반이 차지하는 비중도 대단하다.

교향곡에서 협주곡 쪽으로 눈을 돌려보면…

이 부분은 달리 평할 이유도 없을 것 같다. 클라라 하스킬에 대한 설명에서 다 이야길 했으므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과 24번의 절대명반이야 당연한 것이니 말이다.

많은 협주곡을 남기진 않았지만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과 베르크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은 명반으로 기억되고 있다.

Posted by sni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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