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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는 조금 흐렸고, 공기는 바닥에 착 가라앉은 듯 천천히 흘렀다. 오래 전, 파르르 들썩이는 심장을 억지로 눌러 진정시킨 채 ‘어른의 마스크’를 쓰고 대중 앞에 섰던 10대 소녀는 어느덧, 세월의 연륜이 조금씩 내려앉은 30대 얼굴이 되었다. 신기한 건 지금이 훨씬 더 예쁘다는 거다.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윌리엄 아이리시의 미스터리 소설 <환상의 여인>이 가만히 오버랩된다. 어젯밤 나를 강렬히 사로잡았던 그녀, 하지만 나를 빼고는 아무도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는 기묘한 상황. 어젯밤 지그시 바라봤던 빨간색 입술과, 빨간 드레스의 아찔한 허릿선과, 나직하게 풍겨오던 샤넬 넘버 5의 향기, 모두 뚜렷이 기억나는데 오직 그녀의 존재만이 증발되었다. 

어쩌면 피천득의 <인연> 속 아사코의 모습과도 통할지 모른다. 평생 세 번밖에 만나지 못했건만 뇌리 한구석에 늘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는 그 여인. 아니면 영화 역사상 최초의 팜므 파탈로 불렸던 베티 데이비스가 등장한 <이브의 모든 것>의 ‘이브’일지도. 욕망, 사랑, 뇌쇄,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인간적인 아픔이 뒤섞인 그 존재감 말이다. 그녀는 애잔한 슬픔과 대견스런 자긍심이 반쯤 섞인 듯한 묘한 자태로 끊임없이 기억을 소환한다. 아마, 대다수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드라마 <이브의 모든 것>에서 여인의 향기와 욕망과 미모를 마음껏 발산했던 당시, 그녀는 10대를 막 관통한 다음이었다. 그렇게 소녀 적부터 ‘어른의 마스크’를 쓰고 있었던 그녀는 (최소한 외모상으로는) 한 치의 변함도 없이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채 영광과 고락을 온몸으로 관통해온 자만이 내놓을 수 있는 아렷한 입매와 눈빛으로 카메라 렌즈를 쏘아본다. 

<아이리스>로 대중의 기억 속으로 재소환된 뒤 (고등학생 때 첫 주연을 맡았던 영화를 제외하면) 사실상 영화의 첫 타이틀 롤을 맡은 셈이라는, <가비>라는 묵직한 작품을 들고 돌아온 배우 김소연의 이야기다. 



사진 속에 묘한 슬픔이 배어 있는 것 같다. 빛바랜 듯한 톤으로 촬영을 해서 그런가?

맞다. 그러고 보니 묘하게도 내가 늘 봐오던 얼굴이 아니네. 그동안은 항상 각 좀 잡고 딱딱한 느낌으로 찍어왔는데 오늘은 내가 봐도 낯선, 묘한 분위기의 사진이 나온 것 같다. 


혹시 요즘 슬프거나 불안한 일이 있나?

그런 건 아닌데…지난해 12월부터 잠을 전혀 못 자고 있다. <가비>촬영은 9월에 사실상 끝났다. <아이리스>의 여파로 드라마 대본이나 시나리오가 계속 들어오고 있을 때라 다른 작품으로 넘어갈까 하다가 말았다. <가비>에 워낙 애착도 많았고, 관객에게 새로운 내 모습이 어떻게 비칠지 두려움 반, 기대 반이었기에 일단 개봉 이후 반응을 온몸으로 느껴보고 싶었다. 그런데 개봉할 생각을 안하는 거지. (웃음) 정말 2월까지 매일같이 꿈을 꾸고 잠을 깨고 하는 밤을 반복해왔다. 하도 꿈을 많이 꾸다 보니 낮에 겪은 일이 꼭 꿈속에 등장하기도 하고, 어쩔 때는 결말을 좋은 쪽으로 바꿔보려고 눈을 떴다가 다시 잠을 청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요즘 현실이 잘 믿어지지 않기에 그 중압감이 꿈으로 그대로 옮겨진 거겠지. 


그래도 어젯밤에 <가비>의 본 예고편이 인터넷에 떴던데. 

원래 크리스마스 개봉 예정이었는데 이제야 상영날짜가 확정된 거다. 어젯밤에 트레일러를 보고 나서야 마음이 놓이더라. 아, 개봉 못하는 게 아니었구나 하고. (웃음) <아이리스> 이후 새롭게 다가온 요즘이 내게는 그만큼 꿈결 같으면서도 절실했던 것 같다. 


영화 촬영 현장은 어땠나. 영화 주연 경험이 꽤 있긴 하지만 어릴 때였기 때문에 간만에 돌아온 촬영 현장이 편하지만은 않았을 듯하다. 

사실 그 동안은 연기를 한다는 게 그리 어렵지 않다는 무의식이 있었던 것 같다. 일종의 ‘관습’이 형성되었달까? 철들기 전부터 카메라 속에서 생활을 해왔으니 어찌 보면 당연하겠지. 지난 1년은 한마디로 관습적인 것들을 모두 버리는 시간이었다. 연기라는 게 더하는 게 아니라 빼는 거구나 하는 걸 난생 처음 체감한 기간이었고, 청평에 있는 세트에서 주로 촬영을 햇는데 나중엔 아예 집에 안 갔다. 거기서 혼자 빨래하고, 머무르면서 ‘따냐’라는 미스터리한 여인을 분석하고, 동화되고, 과잉된 ‘김소연’을 하나씩 버리며 지냈지. 


어머니, 아버지, 집을 무척이나 중요시하는 타입이라 들었는데 의외다. 

그러니까 얼마나 힘들었겠나. 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은데 정말 집에 가지는 못하겠고, 방 안에 틀어박혀서 머릿속에서 한없이 무언가를 무한 플레이하고 있어야 했으니. 아마 어렸을 때였다면 못했을 것 같다. 그래서 서른을 넘은 지금의 나이가 참 좋다. 


워낙 어렸을 때부터 배우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연기라면 이골이 났을 텐데도 그런가? 데뷔했던 10대 때부터 ‘어른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성숙한 얼굴을 가지고 잇다는 것과 실제로 그런 나이를 산다는 건 다른 것 같다. 그때는 현장이 참 어색하고 그랬다. 사람들과 교류한다는 게 무엇인지도 몰랐고 내가 화면에 등장하는 것도 부자연스럽고, 어색했지. 다만 집에서 우리 딸이 TV에 나온다고 무척 좋아해주셨다. 정말 주변에 마루 자랑하시면서. (웃음) 그게 십수 년을 버텼던 힘이었겠지. 


그래도 한국 사회에서 여배우로 산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일 텐데. 

중간에 공백기가 좀 길어지면서 힘들긴 했다. 20대 중, 후반이었지. 가장 활발히 활동해야 할 때 난 왜 이렇게 뒤쪽으로 밀려나고 있을까 하는 강박이 좀 있었던 것 같다. 왜 나에게는 항상 모든 게 쉽게 오지 않지? 왜 나만 이렇게 어려운 거지? 하며 세상 탓도 좀 했고. 그러면서 ‘절실함’이 생겼던 것 같다. 요 몇 달간 잠을 잘 못 잔 것도 이 때문일 텐데. (웃음) 사람들은 이제 좀 편해지라고 하는데 이 정도 절실함 정도는 갖고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인 든다. 연기를 통해 많은 걸 누리고, 많은 이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직업을 가졌다면 그 정도 고생은 해야 하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 말이다. 



<아이리스>가 참 고마운 작품이었겠다. 당신이 재발견되었다는 호평이 줄을 이었는데. 

너무나 하고 싶어서 매달렸던 배역이었지. “소연씨. 그거 합시다. 결정났어요” 라는 말을 들은 날이 정확히 2월 6일이었다. 날짜와 시간, 주변상황까지 또렷이 기억난다. 순간 소리를 너무 많이 질러서 목이 쉬었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그날 밤부터 ‘선화’가 되기 위해 바로 운동을 시작했지. 찍으면서 가슴이 아팠고, 진중히 몰두하면서 연기는 더하는 게 아니라 빼는 것, 김소연이라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최소한의 요소만 남기는 것이라는 걸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지. 그게 용기로 이어져 지금까지 오고 있는 것 같고. 


서른이 넘고 나서 좋은 게 무언가. 사실 여배우는 어릴수록 더 좋다는 인식이 여전한데. 

뭐, 스스로도 상상 못했던 이런 표정이 툭툭 튀어나온다는 것? (웃음) 농담이 아니라 난 정말 지금이 가장 좋다. 현장에서 언니나 누나가 되었다는 것도 참 좋다. 예전에는 항상 막내였기 때문에 오히려 더 긴장하고 스스로 벽을 만들었던 것 같다. 이제 사람들이 나를 편하게 대할 수 있는 나이가 된 거지. 그리고 세월의 때가 붙었다는 것도. (웃음) 오히려 요즘 내가 어릴 때보다 더 열려 보인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방어막이 많이 풀려서 그렇다. 진정한 연기란 그런 거 아닐까? 정말 소름이 돋는 연기는 ‘가짜’가 아니라 ‘진짜’ 감정일 때만 가능한 것 같다. 내 진짜 모습에 실망하는 건 상관없지만 포장한 모습에 사람들이 실망하는 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스스로 속상하지 않으려면 있는 그대로를 보여줘야겠다고 마음 먹고 실천하고 있는 중이다. 


배우를 하고 나서 놓친 부분도 많을 법한데, 친구들과의 일상적인 즐거움 같은 것. 아쉬움은 없었나. 

그런 감정은 사치인 것 같은데? 어렸을 때는 그런 말을 한 적도 있었다. 나도 수학여행 가고 싶어요. 학교 못 나가서 참 서운해요. 지금은 그때 했던 말 다 주워 담고 싶다. (웃음) 돈도 벌 수 있고, 사람들이 관심도 가져주는 직업을 갖고 있다는 걸 소중이 여겨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사람들이 나중에 당신을 어떻게 기억하길 바라나. 

16세 때 데뷔를 했다. 언젠가 글을 하나 읽었는데 ‘김소연이라는 배우는 항상 우리 옆에 있었을 것 같고, 앞으로도 있을 것 같은 배우’라는 대목이 마음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때는 “쟤가 중학생이래.”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는 “어? 김소연도 대학생이 되었네?” 라는 말을 들으며 살았던 것 같다. 사람들은 계속 그러겠지. “요즘 좌절을 겪었는데 저 여자의 인터뷰를 모니 그녀도 좌절한 적이 있었네? 우리와 비슷하다” 라고. 30대를 넘어 40대가 되었을 때도 내 또래였던 저 사람이 이렇게 나이를 먹었구나. 라는 기분을 공유했으면 좋겠다. 

우리는 같은 식단을 보내고 잇다는 것, 그리고 얼굴에 세월의 무게가 더해가고 더께가 쌓여가는 걸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그만큼 인생 이야기를 함께할 수 있는 배우가 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외모만 예쁜 배우가 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런 배우는 배우가 아니라 그냥 움직이는 인형, 후하게 말하면 모델 정도가 되겠다. 움직이는 인형과 배우의 차이는 마음가짐, 철학의 유무이다. 배우란 다른 사람의 인생을 연기하는 사람이다. 무대 위에서, 카메라 앞에서, 상대 배역의 배우 앞에서 그야말로 날아 다녀야 한다. 하지만 얼굴이 예쁘게 나와야 한다며 카메라에 찍히는 앵글을 신경 쓴답시고 상대방의 눈을 보지 않고 귀를 보며 연기한다는 젊은이들에게 일침을 가했던 원로배우 윤여정의 발언이 생각난다. 


김소연은 직업배우로서의 마음가짐과 철학이 갖춰진 배우이다. 여러 인터뷰를 통해 그녀의 심성과 철학을 간접 경험하였지만 이 아레나 옴므 화보와의 인터뷰에서도 역시 그녀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인 배우를 하고 싶었고 그렇게 배우가 됐으면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 아쉬움같은 건 사치라고 이야기한다. 또한 선망의 대상인 직업을 가졌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좌절도 겪었음을 알아주고 공감해주길 원한다는 그녀의 인터뷰는 연예인들 사이에서 쉽게 나올 수 있는 내용의 것이 아니다. 더구나 10대 중반부터 주인공을 꿰차며 최연소 주말극 주인공, 최연소 억대 모델에 등극한 화려한 시절을 보낸 여배우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Posted by sni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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