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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을 보면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냉혈한? 카리스마? 천재? 프레디 머큐리를 닮은 이 사람은 천재 중의 천재 피아니스트 아르투로 베네디티 미켈란젤리이다.


20세기를 살았던 음악가 중 대다수는 ‘천재’의 호칭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클라라 하스킬은 찰리 채플린이 인정했던 천재였고 토스카니니는 200여 곡이 넘는 곡의 악보를 완벽하게 암기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발터 기제킹은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암보를 했던 연주자로 꼽히는데 단 하룻밤이면 암보가 끝났다고 전해진다.
그 외에도…일일이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 듯 하다. 정말 그들의 손과 뇌가 부러워질 수밖에 없는 특별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는데 그렇게 천재적인 인물들이 판쳤던 20세기 음악계에서 딱 한 명의 천재를 꼽아보라고 한다면 난 이 사람의 이름을 대고 싶다. 너무도 신경질적이었고 너무도 완벽함만을 추구했던, 그 이름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Arturo Benedetti Michelangeli)이다.

자. 그럼 미켈란젤리란 사람이 얼마나 천재였는지에 대한 사례들을 간단하게나마 나열해 보겠다. 놀라지 마시라.

-그는 의사였다. 14세라는 믿기 힘든 나이에 베르디 음악원을 졸업한 뒤 6년간 의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공군조종사였다. 애국심에 불탄 청년이었고 나치를 혐오했던 그는 공군에 자원입대, 2차 대전에 참전하여 공군조종사로 활약했다. 그리고 포로수용소에 8개월간 수감되었고 목숨을 건 탈출에 성공했다.
-그는 카레이서였다. 그에겐 인체, 피아노, 전투기, 자동차 등 전혀 성격이 다른 물체들이 같은 성격의 것으로 보이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복잡한 것 같지만 질서 있게 움직이는 유기체라는 점에서 인체, 피아노, 전투기, 자동차가 매한가지였던 것이다. 그 질서와 경로, 원리만 알면 아무리 복잡한 기계도 그에겐 간단해 보였다.
-한 대의 피아노를 완벽하게 분해하여 다시 완벽하게 조립할 줄 아는 연주자였다. 어느 누구도 미켈란젤리만큼 피아노의 메커니즘을 정확히 꿰뚫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사람들끼리 이런 내기를 한다. 어떤 연주자의 어떤 곡을 듣고 과연 미스터치가 몇 개가 나올지. 거짓말처럼 들리겠지만 미켈란젤리의 연주에 미스터치가 있는 쪽에 돈을 건 사람은 돈을 딴 적이 없다. 그의 연주엔 단 하나의 미스터치도 없다.
-피아니스트이기도 했지만 뛰어난 오르간 연주자였다. 작곡과 바이올린도 공부했다.
-그는 뛰어난 교육자였다. 말이 필요 없는 두 사람. 폴리니와 아르헤리치가 그의 제자였다.

이 정도이다. 훗~. 그런데 그는 그 천재적인 성격 대신 너무도 완벽함을 추구했고 그래서 너무도 괴팍하고 까탈스러운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번에는 그의 괴팍, 까탈스러운 성격의 일화들을 나열해 보겠다.

-피아노를 비행기에 싣고 다녔던 연주자. 이런 사람 또 있다. 바로 호로비츠. 둘 다 성격은 도찐개찐이다.
-연주회 취소의 대명사. 손이 시려서 못해, 청중이 기침하니까 기분 드러워서 못해, 게다가 애지중지 싸 갖고 댕기는 피아노가 상태가 안 좋아? 그럼 당연히 못해.
-뒤끝 엄청 강한 사람. 그토록 사랑했던 조국 이탈리아가 훗날 자신의 명예를 건드리는 짓거리를 하자(이 부분은 뒤에 자세히 설명하겠다) 미련 없이 스위스로 망명한다. 그리고 스위스 망명 후 이탈리아 땅을 바라보곤 오줌도 누지 않았다. 그뿐 인줄 아는가? 자신의 연주회에 이탈리아인들이 입장하는 것은 절대 불허했다. 1975년에 열린 바티칸 연주회에선 8천 명에 달하는 이탈리아인을 모두 강제 퇴장시켜버렸다. 그리고 1993년에 열린 런던에서의 공연에서 주최측이 몰래 80장의 표를 이탈리아인들에게 판매한 것을 알자 너무도 당연히 공연을 취소시켜버렸다. 어떤가? 뒤끝 끝내주지?
-웃지 않는 사람. 그는 어떤 경우에도 청중들 앞에서 웃지 않았다. 항상 근엄하고 오만한, 그래서 무척 무섭게 느껴지는 인상만을 지을 뿐이었다. 그래서 이야긴데 그의 사진 중에 빵긋 웃고 있는 사진은 단 한 장도 없다.
-제5회 쇼팽 콩쿨. 미켈란젤리는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심사결과 자신이 생각한1위와 2위와 뒤바뀌었다며 심사위원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그 2위의 피아니스트는 누구였을까? 그 이름도 유명한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였다.
-인상만 오만한 것이 아니라 성격 자체가 무척 오만했고 또 외로웠다. 그래서 그는 피아니스트로서의 인생 자체를 즐길 줄 몰랐고 만족하지 못했다.
-부인을 대동하지 않는 사람. 그는 공식석상에서 부인을 대동하는 법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가 미혼남성인줄 알고 있었다.


글쎄? 이 정도면 빵긋 웃는 얼굴로 볼 수 있을까?


미켈란젤리는 1920년 생이다. 그의 아버지는 다방면에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는데 법률가이면서 음악에 대한 사랑이 남달라서 세 살짜리 어린 아들에게 피아노, 바이올린, 작곡을 비롯한 다방면의 음악교육을 시켰다. 9살 때부터 밀라노의 베르디 음악학원(Conservatorio di musica “Giuseppe Verdi” di Milano)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게 되는데 14세에 무척 빨리 졸업을 하였다. 하지만 그때까지의 미켈란젤리는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힘든 예술가의 길을 걷겠다는 적극적인 의지는 없었다.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의학공부에 매진하였다. 그의 나이 19세때까지였다. 이와 비슷한 사람 또 하나 있다. 20세기 바이올린의 神(나만의 생각인데 이렇게 표현하면 딴지 걸 사람 많을까?), 프리츠 크라이슬러이다. 하지만 크라이슬러와 미켈란젤리의 성격은 하늘과 땅 차이다.

18세엔 드디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제2회 국제 콩쿨(훗날 퀸 엘리자베스 콩쿨이 된다)에 출전, 7위에 입상하였다. 이 때 1위는 그 유명한 소련의 에밀 길렐스였다. 이때부터 미켈란젤리는 그의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이다.

바로 이 사진. 1938년에 열린 콩쿨에 참가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왼쪽에서 두 번째 키작은 사람이 일등먹은 길렐스. 그리고 맨 오른쪽 키 큰 사람이 미켈란젤리.


그 다음해, 미켈란젤리는 다시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콩쿨에 출전하여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하게 되는데 바로 이 콩쿨에서 1위를 하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이때 유명한 일화. 하스킬의 스승이기도 했고 20세기 전반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의 하나로 꼽혔던 알프레도 코르토에게서 ‘a new liszt’라는 극찬을 받았다. 바로 제네바 콩쿨에서 1위를 함으로서 미켈란젤리는 자신의 인생을 음악에 바치기로 결정하게 된다.

괴팍? 하지만 철저한 노블리스 오블리제

마치 밥 먹듯이 연주회를 취소하는 일이 잦았고 너무도 완벽함만을 추구했기에 까탈스럽고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미켈란젤리.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그토록 까탈스러운 성격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따뜻한 심성의 소유자였고 불타는 애국심과 정열적인 교육열을 함께 지닌,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몸소 실천한 사람이었다.

미켈란젤리는 2차 대전 중에 공군으로 자원 입대한다. 여러 정황으로 봤을 때 그는 군대에 가지 않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스스로 입대하여 공군 조종사로 활약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조종하던 전투기가 격추되어 포로 수용소에 잡혀 8개월간 잡혀 살기도 했다.
포로수용소에서 목숨을 건 탈출에 성공한 미켈란젤리는 그 후 나치즘, 파시즘을 반대하는 지하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미켈란젤리는 호로비츠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연주가 맘에 들지 않으면 맘대로 연주회를 취소하기도 했고 전용 피아노를 비행기에 싣고 다녔는데 호로비츠와 비슷한 점이 또 있다. 무려 10여 년에 걸친 공백이 그것이다. 그는 한 몸에 지닌 재주가 너무 많았던 사람이라 여기저기 다른 공부에 빠져 살 때도 많았는데 2차 대전의 종전 후 다시 연주활동을 재개하여 영국, 미국 등지에서 실력을 뽐내며 최고의 연주자로 평가를 받아가던 그 시점에 갑작스레 잠적, 연주를 중단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유는 건강상의 문제 때문이었다.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 10여 년의 공백을 깨고 다시 복귀한 미켈란젤리. 이때부터 그는 다시 활발한 활동을 시작한다. 그러나 1968년, 그 괴팍하고 불 같은 성격의 미켈란젤리의 심기를 크게 건드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미켈란젤리의 전속계약사인 BDM 레코드 회사가 파산하면서 법원은 미켈란젤리의 분신 같은 피아노 두 대를 압류했고 그의 재산 9억 리라와 집을 모조리 앗아간 것이다. 단단히 심기가 뒤틀린 미켈란젤리는 크게 실망한다. 조국을 위해 공군조종사로 자원 입대했고 지옥 같은 포로수용소에서 8개월을 살았던 미켈란젤리에게 있어서 조국의 이와 같은 행동은 크나큰 배신, 그 자체였다. 이에 미켈란젤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스위스로 망명을 해버리고 만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탈리아 사람들은 자신의 연주회에 절대로 입장할 수 없도록 하였고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몰래 표를 팔았다가 들키면 곧바로 연주회를 취소해 버렸다.

미켈란젤리에게서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또 한 가지는 교육자로서의 열성이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서부터 후학을 양성하는데 큰 재미와 열성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볼로냐의 마르티니 콘서바토리의 교수부터 시작하여 평생 동안 수많은 마스터 클래스, 아카데미를 개설하여 후학을 양성하는데 노력했다. 그리고 진정 재능이 보이는 제자라면 그 제자를 위해 무료로 강습해주고 생활에 필요한 전액을 지원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런데 제자를 가르치는 부분에서도 그만의 독특한, 대단히 까탈스런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 유명한 마르타 아르헤리치에 대한 일화가 그것이다. 아르헤리치가 유명해지자 미켈란젤리는 그녀가 자신의 제자라고 자랑을 하고 다녔는데 아르헤리치는 이 말을 듣고 크게 격분, 반박한 것이다. 정작 그녀는 대 피아니스트의 가르침을 받고자 오랜 시간을 기다렸지만 음악에 대해 가르쳐 준 것은 하나도 없고 산책이나 하면서 스파게티 국수 삶는 법 같은 쓸데없는 이야기나 하고 다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명 지휘자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와 이야기 할 땐 언제나 음악에 대한 이야기만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우리치오 폴리니 역시 미켈란젤리에게서 배웠던 시간은 잠깐이었지만 자신의 음악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항상 이야기한다.
이와 같은 사례를 미루어 볼 때 미켈란젤리는 자신의 맘에 드는 제자, 재능이 있어 보이는 제자에게만 열과 성을 쏟아 부었고 남들이 아무리 천재라고 칭찬하더라도 자신의 맘에 들지 않으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너무도 많은 재주를 타고 났고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인정받으며 살았지만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큰 행복, 만족감을 느끼고 살진 못했다. 피아니스트로 산다는 것은 대단히 괴롭고 피곤한 일임을 항상 토로했고 그래서 그는 연주회장에서 청중들을 향해 정중히 인사만 할 뿐 웃는 법이 없었다. 자신이 하는 일은 위대한 작곡가들의 작품을 전달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청중들에게 보여줘야 하는 쇼맨십 따위는 거추장스럽게만 느껴졌다. 그는 항상 이렇게 이야기했다. 청중들을 위해서 연주하는 것이 아니고 나와 작곡가를 위해서 연주하는 것이라고.

생의 마지막 유언마저도 그다운 삶의 연장선이었다. 1995년, 스위스의 루가노 근교에서 지병인 심장마비로 숨진 그의 유언은 묘비도 필요 없고 무덤에 십자가 하나만 세워달라는 것이었다. 사망시간도 발표하지 말고 병명도 밝히지 말아달라고. 그렇게 조용히 가고 싶다고 했다. 한 세상을 풍미하며 너무도 많은 재주를 발휘한 대 피아니스트. 무결점의 완벽함만을 추구했기에 무척이나 괴팍스럽고 까다롭다는 악평을 들어야만 했던 피아니스트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 하지만 그는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몸소 실천한 뜨거운 심장을 가졌고 마지막 가는 그 순간엔 공수래 공수거의 이치를 실천한 참으로 멋있는 삶을 살다간 인물이었다.

Posted by sni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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