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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르 루빈스타인(Artur Rubinstein). 20세기를 살았던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 중 하나인 그는 쇼팽의 대명사, 쇼팽의 교과서였으며 좋은 인품과 성격을 지닌 모두에게 존경받는 예술가였다.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은 20세기 전반부의 피아니스트를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도 없고 빼놓아서도 안되는 위대한 피아니스트이다. 1887년에 태어나 1982년까지 무려 95년을 살며 90세까지 현역으로 활동했던 대단한 노익장을 과시했고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작곡가의 수많은 곡을 연주하며 너무도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피아노의 선율을 들려준 거장 중의 거장이었다. 

루빈스타인은 쇼팽의 나라인 폴란드에서 유태인의 핏줄을 받고 태어났다. 대부분의 거장이라 불리는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루빈스타인 역시 어릴 적부터 음악에 대한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난 것으로 전해지는데 암보와 초견에 무척 능했다고 한다. 특별히 연습도 없이 악보를 한 번만 보고 바로 연주회에서 완벽한 연주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루빈스타인이 가지고 있는 천재적인 잠재력을 처음으로 발굴하고 인정해준 사람은 요제프 요아힘(Joseph Joachim)이었다. 요아힘은 브람스의 평생지기로도 유명한 독일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는데 바로 이 요아힘이 루빈스타인의 재능을 알아보고 음악교수인 칼 하인리히 바르트를 소개시켜주면서 루빈스타인은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배울 수 있었다. 

브람스의 평생지기이며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중 하나로 명성을 떨친 요아힘. 앉아있는 사람이 브람스, 서있는 사람이 요아힘.


1900년에 베를린에서 데뷔무대를 가졌고 1904년엔 파리로 건너간 루빈스타인은 바로 그 곳에서 프랑스 음악의 대가들을 만나게 되었다. 바로 인상주의 작곡가인 모리스 라벨을 비롯하여 프랑스 바이올리니즘의 상징적 존재인 자크 티보 등이었다. 루빈스타인은 이들과 친분을 다질 수 있었고 또한 음악적으로 더더욱 성숙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1906년엔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데뷔무대를 가졌고 이후에도 미국에서 몇 번의 공연을 가졌으나 만족할만한 것은 전혀 아니었고 그에게 일신의 성공을 안겨줄 만한 것 역시 아니었다. 그는 항상 빚에 쪼들려 살았고 연주회가 없는 날엔 끼니도 굶는 날이 허다했다. 그리고 이는 그의 게으르고 대책없는 낙천적인 성격과 그 성격에서 비롯된 무절제한 생활에 기인하였다.

그가 좋아했던 것. 파티, 여자, 술. 헐리우드 여배우 탈루아 뱅크헤드(tallulah bankhead)와 키스하고 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루빈스타인이 20세때인 1907년에 베를린의 한 호텔방에서 자살을 시도했던 적이 있다. 천지에 깔린 빚쟁이들 때문에 우울한 생활을 근근이 이어가던 루빈스타인은 뭔 생각이 들었던지 수건에 목을 매어 자살을 시도했으나 그만 그 수건이 루빈스타인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쿠웅~’소리를 내며 자빠진 것이다. 루빈스타인은 훗날 자서전에서 이 사건을 두고 ‘엄청 웃겼고 어리석었던 일’이라고 회고하였다. 하지만 이 웃기고 어리석은 에피소드 때문에 루빈스타인은 자신을 소중하게 돌아보며 앞으로 위대한 예술가가 되겠다는 다짐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다짐 때문에 20세기를 넘어 21세기를 사는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부드러운 쇼팽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루빈스타인은 전쟁에도 참전하였다. 1차 대전 중엔 통역관으로 근무하면서(루빈스타인은 확실히 천재 중의 천재였다. 8개국어를 매우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또한 군인들을 위한 위문공연을 많이 다녔는데 이때 같이 군에서 복무했던 사람이 바로 이자이 콩쿨로도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 유진 이자이였다. 

이처럼 루빈스타인이 살았던 인생의 궤적을 쭉 살펴보면 예술가 특유의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괴벽이랄지 모난 성격보다는 어딘가 빈 듯하고 그렇게 빈 듯한 성격과 인품 속에서 인간적인 면모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인간적인 면모는 그의 손가락을 통해 피아노 연주로 그대로 전사되었다. 루빈스타인의 연주는 같은 시대를 살았던 그의 라이벌이었던 호로비츠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호로비츠의 연주가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풍우라면 루빈스타인은 자연에 생명력을 불어넣어주는 따스한 미풍과도 같았다.

끝없는 배움 속에 이뤄지는 자기성찰

루빈스타인이 좋아했던 또 하나. 바로 시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루빈스타인은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 났지만 성격이 지극히 낙천적이었고 게을렀다. 그 게으른 성격 때문에 빚이 많았고 생활이 무절제했으며 젊은 시절엔 자살까지도 시도했다. 그러나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다가도 이를 다시 추스리고 재도약의 기회로 삼는 것을 보면 그는 대단한 정신력의 소유자이기도 했고 때론 나사가 풀린 듯이 철없는 행동을 하다가도 이를 다시 조절하는 피드백 시스템이 잘 갖추어진 사람이었다. 역시 역사에 남을만한 대단한 거장들은 달라도 뭔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루빈스타인은 자신에게 엄습해오는 위기를 예사롭게 생각하지 않고 그 위기를 통해 새로운 도약의 발판으로 삼을 줄 알았던 사람이었다. 1921년부터 미국에서 본격적인 연주여행을 하며 미국전역에서 명성을 쌓아나간 루빈스타인은 1946년엔 정식으로 미국시민권을 획득하였고 미국이 자랑하는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되었다. 연주회 개런티 역시 최고의 수준을 지급받았고 그의 명성은 당대 최고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그토록 승승장구하던 루빈스타인은 두 명의 피아니스트의 등장에 크나큰 위기감을 느꼈다. 그 한 사람은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였고 또 한 사람은 소련의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였다. 

루빈스타인과 함께 미국땅에서 당대 최고의 자리를 놓고 겨루어야 했던 라이벌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미국 전역을 열광시켰던 젊은 시절의 모습이다.


호로비츠는 루빈스타인보다 17살이나 어렸고 루빈스타인이 쌓아놓은 명성에 비해 호로비츠의 출발은 보잘 것 없었으나 루빈스타인은 그의 등장에 심한 스트레스와 라이벌 의식을 느꼈다. 

러시아의 촌구석에서 망명한 호로비츠는 악마의 혼을 빌려 연주하는 듯한 무시무시하고 살인적인 기교로 전 미국을 충격의 도가니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세계 최고의 지휘자인 토스카니니의 사위가 되면서 그의 명성은 더더욱 널리 퍼지게 되었다. 바로 이 호로비츠의 연주를 듣게 된 루빈스타인은 자신의 기교에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즉시 간파하고 잠적하여 몇 달에 걸쳐 피나는 노력을 했다고 전해진다. 호로비츠가 1904년생이니 루빈스타인과는 무려 17년차이. 아들뻘과도 같고 막냇동생뻘 되는 어린 피아니스트에게 루빈스타인은 큰 위기감을 느꼈고 그 위기를 자신을 거듭나게 하는 자양분으로 삼았던 것이다. 

호로비츠뿐만이 아니었다. 1961년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처음으로 공연을 갖게 된 소련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프는 루빈스타인에게 더욱 큰 충격이었다. 당시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의 공산국가에서만 알음알음 소문으로 퍼져서 알고 있던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그가 처음으로 서방세계의 심장인 미국의 뉴욕 카네기홀에서 가진 연주회는 충격 그 자체였다. 이 공연을 통해 리히터라는 이름이 본격적으로 서방세계에까지 알려지게 되었고 리히터는 전세계적인 거물이 되었다. 이 공연실황을 수록한 음반을 들어보면 수많은 청중들을 압도하는 살인적인 기교와 넘치는 힘을 느낄 수 있고 관중들은 마법에 걸린 듯 크나큰 충격에 휩싸여 열광적인 환호성을 보낸다. 

리히터가 처음 미국에서 가진 카네기홀 공연실황을 수록한 음반. 리히터의 팬이라면 반드시 소장해야 할 가치가 있는 귀중한 음반이다.


관중들의 충격도 대단했지만 누구보다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은 다름아닌 74세의 백전노장 루빈스타인이었다. 서른 살 가까이 차이 나는 애송이, 게다가 소련의 촌동네에서나 유명한 피아니스트 정도로 가볍게 생각했던 리히터의 연주는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리히터의 연주를 직접 접한 루빈스타인은 크나큰 충격에 빠졌고 이후 리히터가 마법을 부리고 간 바로 그 카네기홀에서 한달동안 무려 10회의 연주를 하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수많은 뉴요커들에게 ‘내가 낫냐? 소련의 촌뜨기가 낫냐?’는 것을 루빈스타인은 한 대의 피아노를 통해 확실히 웅변하고 싶었던 것이다. 

기부천사. 피아노로 노래하는 사랑과 평화의 메신저

루빈스타인을 기념하는 이스라엘의 우표. 루빈스타인은 생전 이스라엘에 좋은 일을 참 많이 했다.


루빈스타인이 가장 인간적인 거장이라고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부분은 그의 따뜻한 품성과 인간미에 있다. 루빈스타인은 당대 최고의 개런티를 받으며 부를 축적할 수 있었으나 그가 받은 개런티만큼의 경제적 풍요를 누리진 못했다. 바로 기부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개런티를 자선단체에 아낌없이 기부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유태인이었던 루빈스타인은 유태인의 나라 이스라엘의 음악발전을 위해서도 힘썼다. 이스라엘에서 열린 그의 연주회 개런티를 아낌없이 기부하였고 훗날 이스라엘에선 그의 업적들을 기리는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콩쿨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나치에 항거하였다는 점 역시 루빈스타인의 이력에서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나치를 혐오하였고 공공연하게 비판하였다. 평소 사이가 좋았던 발터 기제킹과 나치에 대한 시각 때문에 사이가 멀어졌다는 일화도 있고 나치에 자진 입당하였고 나치의 앞잡이가 되는 것도 마다하치 않았던 카라얀과는 협연을 하지 않았다. 젊었을 땐 전쟁에 참전하여 조국을 위해 싸웠고 조국을 멸망시키고 전 유럽을 악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은 나치에 항거하였으며 나치를 가까이 한 자들과는 협연도 하지 않았던 루빈스타인의 삶의 자세.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변절을 어렵지 않게 생각했던 카라얀류의 인간과는 비교자체를 불허하게 한다. 이런 그에게 어찌 인간다운 거장 중의 거장이란 칭호를 붙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업적을 쌓았고 자연스러움이 배어 나오는 부드럽고 아름다운 선율을 들려준 루빈스타인은 90세까지 현역으로 활동하였고 95세의 나이에 빛나는 생을 마감하였다.



루빈스타인이 연주하는 쇼팽의 왈츠 중 '화려한 대왈츠(Grande valse brillante)'. 가장 아름답고 인간적이며 자연스러운 쇼팽의 왈츠를 들려준다. 

Artur Rubinstein (piano)
녹음: 1963/06/25 Stereo, Analog
장소: RCA Italiana Studios, Rome

Posted by sni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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